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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슈몰이의 주인공 조영남 에 대해 알아보자

by 생생기자 2023.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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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조영남
趙英男 | Jo Young Nam
출생
1945년 5월 13일 (77세)
황해도 평산군
(現 황해북도 평산군)
본관
배천 조씨
국적
 
대한민국
 
신체
167cm, O형
학력
강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성악 / 중퇴)
서울대학교 (성악 / 명예학사)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신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육군본부 본부사령실)
데뷔
1968년 노래 '딜라일라'
종교
개신교
가족
8남 1녀 중 7남
동생 조영수(1947년생)
슬하 2남 1녀

1. 소개

 

1968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과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가수.
사실 본업인 음악 뿐 아니라 작가, 화가, 방송인,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왔습니다.
솔비나 구혜선, 홍서범 등도 종합 예술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앞선 조영남이 원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성희롱, 그림 대작 등 각종 사건사고로 여러가지 구설수나 계속해서 만들어대는 트러블 메이커로 인해 평이 안 좋습니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화합을 내포한 '화개장터'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참고로 그는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인 김한길 전 문화관광부장관이 했습니다.

 

2. 데뷔 전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나, 1.
4 후퇴의 피난 행렬에 섞여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습니다.
조영남은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에 한양대학교를 자퇴하였는데, 자퇴의 이유가 재밌다.
2013년 10월에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후배 김승일과 함께 출연하여,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를 설명하며 "2학년이 됐는데 신입생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여자가 들어왔었습니다.
그 여자가 한양대학교에 오는 걸 매일 몰래 봤습니다.
걔가 입학한 후로 온 정신은 '그 애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였습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걔를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학교에서 그 여자와 내가 데이트 한다는 소문이 났고 약혼자가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습니다.
"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리고 조영남은 "학교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퇴하게 됐습니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고 그 여자는 파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2015년 10월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서는 한양대 자퇴에 대해 "잘렸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즉 이날 방송에서 조영남은 "내가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잘린 적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출연진들이 "연애를 한다고 학교를 잘리냐?"며 의아해했고, 조영남은 "약혼한 여자와 눈이 맞은 거였습니다.
그 때는 내가 전액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걸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자퇴서를 냈습니다.
이후 공부를 해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1964년에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는데, 1968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대 성악과도 이후 자퇴하였습니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측에서 조영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자퇴의 이유에 대해 조영남은 2010년 9월 방송된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중 미8군 오디션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수입이 좋아 더 이상 학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자퇴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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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조영남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합니다.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합니다.
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합니다.
이후 텔레비전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실 지금 젊은 층은 (조영남의) 히트곡이라고 하면 화개장터 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19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5,000장을 팔았다고 하니 19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입니다.
스타가 되어 돈을 많이 번 뒤에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4. 결혼과 전성기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습니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입니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통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윤여정은 결혼생활동안 조영남에게 헌신적이었고, 1970~80년대 미국에서 두부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 두부를 좋아하던 조영남을 위해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ㅈ'조차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 기세등등한 강호동과 유세윤도 몸 둘 바를 모른 채 진행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그래놓고는 나중에는 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었다는 망언을 했습니다.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이혼이라는 건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합니다.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19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한테 이미지가 좋냐면 그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5. 가수 은퇴 후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 다큐 형태의 방송을 이끌었으며, 2006년부터 2016년 5월 16일까지 MBC 표준FM의 오후4시 ~ 오후6시 라디오 프로그램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를 맡았습니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가수 쪽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폐업 상태이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불러줍니다.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습니다.
한국 연예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재산가다.
그가 살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집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원 이상, 실거래가는 100억 원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사실 그 고급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모았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돈을 엄청 잘 벌어서 저런 재산가가 된 것입니다.
특히 재건축을 거듭할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는 있었는데,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합니다.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그린 그림입니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에서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괜히 조영남이 아닌지라 사건사고 문서에서 설명하듯 큰 사건을 또 일으켰습니다.
이런저런 안 좋은 행각들이 크게 알려진 뒤론, 그의 취급은 기존의 비호감, 노망난 사람의 이미지를 넘어 거의 범죄자 수준으로까지 떨어졌습니다.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면, 품위있는 행동을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려준 인물입니다.

 

6. 가창력에 관하여

 

 

 

7. 작곡과 음악성에 관하여

 

작곡 능력은 평범한 편입니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음악적으로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입니다.
애초에 그의 히트곡 대부분은 자기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그대로 가져다가 가사만 한국어로 바꾼 것입니다.
다만, 불멸의 히트곡 화개장터가 있으니 작곡가로서 완전히 꽝은 아니고 대한민국의 인기가수로서 체면치레 정도는 한 셈입니다.
클래식에 대한 조예는 깊을지 모르나 대중가요에 대한 이해는 몹시 부족해서,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로,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
김민기와 송창식, (그리고 평가는 이들에게 살짝 못미치지만) 양희은 등이 세시봉의 한계였던 번안곡, 포크에 한정된 음악성,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뛰어난 음악세계를 이루어 내는 데 성공했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멈춘 셈입니다.

 

8. 기타

 

과거에 에버랜드의 시설 중 하나인 지구마을의 노래도 조영남이 불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해당 곡은 윤석중이 작사, 김규환이 작곡했다고 나옵니다.
아마 행사 때 부르거나 했던 게 와전된 듯 한데 에버컴티에서 한 회원이 지구마을 개장당시 나눠줬던 지구마을 LP판을 보면 작사는 윤석중, 작곡은 김규환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가수로는 조영남이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어 사실입니다.
보통 가수들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 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공전절후의 히트곡인 '화개장터'일 텐데 가사부터가 '구경 한번 와보세요' 로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 보니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바로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 이야기입니다.
2001년 원로가수 고운봉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는데 사실 '모란동백'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닙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
그런데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는 자기가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쳤습니다.
근데 꼭 자기가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 으로 들리기는 했습니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으며 마라톤 대회에서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렸을 때 자기 혼자만 죽어라 뛰었습니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조영남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필승'이란 격려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완전히 돌았군!'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으며 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본인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열 터져서 이경규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며 열 터지는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조영남 몰래카메라.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습니다.
이주일 문서에서 서술했지만, 이주일이 생전에 유일하게 외모로 우위(?)를 점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극장식당에 출연해 그의 얼굴을 본 어린아이가 울자 이주일이 한 촌철살인 멘트는 압권.
자세한 것은 이주일 문서로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 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한 적이 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습니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했으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 및 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습니다.
위에도 잠깐씩 얘기가 나왔지만, 책을 여러 권 냈고, 잡지에 칼럼을 장기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글재주도 준수해서 맛깔스럽게 잘 쓰는 편입니다.
다만, 글 내용 중 검증되지 않은 내용에 자기 자랑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
당연하지만, 저건 칼럼이 절대 아닙니다.
군대 시절 조영남은 육군본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근데 웃긴 건 자기 대학교 동창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중대장으로 있는 바람에 되려 꿀이란 꿀은 죄다 빨고 편하게 군복무를 하다 왔다고 합니다.
의외의 사실로 건설안전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아주 지겹도록 듣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2014년에 당시 26년 만에 신곡 통일바보를 발표했습니다.
일본에 조영남의 사생활 논란과 관련해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인물로 콘도 마사히코가 있는데, 이 사람도 조영남이 데뷔한 지 1년이 되는 해에 태어났습니다.
1980년대 중반 어느 티비 쇼에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이용과 같이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용의 히트곡 중 하나인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이라는 곡을 듀엣으로 불렀습니다.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조영남이 열창을 시작하니 같이 부르던 이용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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