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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뜨고 있는 이미자 무슨 사연이?

by 생생기자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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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이미자
李美子
출생
1941년 10월 30일 (81세)
경기도 경성부 한남정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국적
 
대한민국
 
본관
전주 이씨
신체
160cm, 48kg, A형
직업
가수
장르
트로트
데뷔
1959년 〈열아홉 순정〉
활동 시기
1959년 ~ 현재
가족
아버지 이점성, 어머니 유상례
2남 4녀 중 장녀
배우자 김창수
 정재은, 아들
종교
가톨릭 (세례명: 체칠리아)

1. 소개

 

 

 

2. 가수 활동

 

대표곡으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여자의 일생』, 『내 삶의 이유 있음을』, 『열아홉 순정』 등이 있습니다.
70~80년대 데뷔한 많은 여가수들이 지금은 은퇴 혹은 활동을 안 하고 있으나 63년째 한국 트로트 가수 사상 최장기간 활동 중입니다.
이미자의 노래는 일본 엔카 스타일의 곡 분위기와 창법으로 인해 왜색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들이 5음 음계 중심, 7·5조 가사의 폭스트롯이라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똑같습니다.
왜색이기는 하나, 사실 60년대 당시 장년층 이상에게는 젊은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향수로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원로가수이지만 고령층에 안티팬이 상당한 편입니다.
아래 후술되겠지만, 첫남편과 이혼한 뒤 친딸을 외면하고 산 이야기나 후배 여가수 죽이기 등 나쁜 일화가 많아서 평이 상당히 안 좋습니다.
동시에 이미자 관련 뉴스나 유투브 댓글을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의 악플이 꽤 많습니다.
이미자 이미지의 원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입니다.
전쟁의 상처를 서서히 회복해가던 전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화려하고 도회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의 가수들 역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패티 김으로 대표되는 그 여가수들 가운데서 이미자는 고향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연상시켰습니다.
그녀와 대비되는 패티 김은 서구풍의 가곡이나 스탠더드 팝 같은 우아한 곡들을 불렀고, 이와 대비되게 서구적으로 편곡한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신민요 가수들도 있었지만 이미자는 사실 대중들에게 훨씬 친숙한 일본풍 엘레지로 대중들의 마음을 달래왔습니다.
총 2000곡이 넘는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그 당시 '이미자가 싫어하는 여가수는 왕따를 당했다'는 얘기도 있었을 정도로 60년대 그녀는 대중음악의 아이콘이었고 그 당시 한국전쟁 이후 민족의 한을 달래주던 여가수였습니다.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가수 정재은을 친딸로 대우하지 않고 냉대했습니다.
정재은은 2살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친어머니 이미자를 단 3번 만났다고 했는데, 가정사가 복잡하다고만 할 뿐 정확한 단절의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90년대 후반 펴낸 자서전에서 이미자는 딸아이를 지금껏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정확한 언급을 피했으며, 이혼 후 아이를 보지 않았던 것은 전남편과 계속 얽히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일화는 일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합치되는 듯한 면도 있습니다.
관련기사 아이러니하게 이미자 자신도 어린 시절 생모와 헤어진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전남편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며 현 남편은 한국방송공사 PD출신.
2011년 12월 25일 MBC 창사 50주년 콘서트 <이미자와 친구들>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석했는데, 이 콘서트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단원을 격려하기 위한 자선콘서트입니다.
특히 그녀는 출연료를 세네갈에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기부해 수술에 보탰다고.
이 콘서트에서 그녀는 직접 아이유에게 마이크를 건넸고, 아이유는 그녀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을 불렀습니다.
2019년 5월 2일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28일 MBN과의 인터뷰에서는 은퇴는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도 새해들어 2020년 2월에도 스케줄이 잡힌 걸로 보아 정말 은퇴가 아닌 듯.
또한 2020년 10월 추석을 맞아 TV조선이 실시한 2020 트롯 어워즈에서 대상을 거머쥐었습니다.

 

3. 대표곡

 

  • 1959년 열아홉 순정
  • 1963년 님이라 부르리까
  • 1964년 동백아가씨
  • 1964년 여자의 일생
  • 1964년 황포돛대
  • 1965년 살아있는 가로수
  • 1965년 울어라 열풍아
  • 1965년 저 강은 알고 있다
  • 1965년 홍콩의 왼손잡이
  • 1966년 지평선은 말이 없다
  • 1966년 흑산도 아가씨
  • 1967년 그리움은 가슴마다
  • 1967년 빙점
  • 1967년 섬마을 선생님
  • 1967년 유달산아 말해다오
  • 1967년 첫눈 내린 거리
  • 1969년 기러기 아빠
  • 1969년 한 번 준 마음인데
  • 1969년 황혼의 블루스
  • 1971년 아가씨
  • 1972년 낭주골 처녀
  • 1972년 삼백 리 한려수도
  • 1972년 여로
  • 1973년 서울이여 안녕
  • 1977년 모정
  • 1978년 눈물이 진주라면
  • 2009년 내 삶의 이유 있음은
  • 2019년 내 노래 내 사랑 그대에게

 

4. 이야기들

 

  •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 했지만, 사실 데뷔 자체는 '열아홉 순정'이라는 제목의, 스윙 재즈 빅밴드 편성의 미국식 스탠다드 팝 스타일이 농후한 곡이었습니다. 50년대 당시는 주한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대중음악 문화가 직도입 되던 시기였고 대중 가수들 또한 미군 클럽을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해야했는데, 이미자도 당연히 이런 영향을 받았던 것. 그러나 이미자는 60년대의 동백아가씨의 엄청난 히트 이후에는 트로트 가수로 완전히 정착합니다. 반면 동시대에 데뷔했던 패티김은 아예 그 후에도 꾸준히 스탠더드 팝 성향의 곡으로 활동했습니다.
  • 이미자 사후에 성대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이미 개런티를 지불했다는 '사후 성대 기증설'이 떠돌아다녔는데 당연히 사실무근입니다.
  • 2016년 8월 8일 소득을 축소 신고해 세금을 탈세했다는 판결을 받았고, 서울행정법원에 항소했으나 2018년 8월 7일 기각되었습니다. 세무조사 결과 수익의 상당부분을 현금으로 받고 신고하지 않거나, 남편의 계좌에 입금 혹은 아들에게 20억 원을 증여하는 등 지난 10년간 총 44억의 소득을 고의 누락했으며, 추가 납부해야 하는 세금액만 20억 원이라고 합니다.
  • 2017년 10월 1일 KBS 전국 노래자랑 서울특별시 서초구 편에 본선 심사위원 겸 피날레 초대가수로 등장했습니다. 평소 전국 노래자랑은 물론이고 가요무대에도 자주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미자 본인이 30년 가까이 서초구 반포동에 거주한 서초구민이었기에 출연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 차원에서 출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날은 특별히 10분 더 방송을 했었습니다. 마침 촬영 당시 서초구에서 서리풀 페스티벌이라는 지역 축제가 열렸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전국노래자랑의 촬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당초 2016년에도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스케쥴 때문에 불발돼서 아쉬웠다고 합니다.
  • 가수로서의 명성과 영향력과는 별개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무대가 끝난 후 사인을 요청하는 팬을 무시하고 차에 타버린 일화가 유명할 정도. 다만 상기 성대 기증설이 그렇듯 루머도 감안해야 합니다.
  •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났는데, 아버지의 재혼 전후에도 가정적으로 외로운 편이었다고 합니다.
  • 1960년 당시 스무살 나이로 결혼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출신 전 남편 정진흡 씨와 1964년, 4년 만에 이혼을 했는데, 원인은 남편의 가정 폭력이었습니다. 1970년 KBS 방송위원이자 PD였던 김창수와 재혼했습니다. 재혼 후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지만, 종갓집 큰며느리, 이른바 '종부'로서 때마다 제삿상 음식을 준비하는 등 가정주부의 삶이 만만치는 않았다고 합니다.
  • 친딸이었던 정재은(1964년 8월 25일생)은 두 살 이후 평생 만난 것이 세 번이었는데, 우연이 아닌 만남은 일곱살 때 외할아버지가 몰래 사흘간 데려가 함께 생활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딸의 결혼식에도 이미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일설에는 딸 정재은이 결혼 6개월 만에 이혼을 겪은 직후 공항에서 이미자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미자는 "잘 살지 그랬니..."는 말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1987년으로 두번째 만남이었는데, 당시 인사 드리라고 권한 이는 전영록이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에도 딸은 반갑게 인사하였지만 이미자는 사람들 눈치에 못 본 체 했다고.
  • 딸 정재은은 가수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 중입니다. 1978년 KBS 국악가요제에서 '무지개 피는 곳에'로 최연소 특별상을 수상하며 데뷔, 1979년 일본 진출 후 2001년 오리콘 차트 엔카 부문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 트로트 이미지 때문에 무수히 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를 상당히 많이 당했습니다. 일례로 1989년 가수 생활 30년 기념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대관신청을 했으나, "이미자의 노래는 '고무신짝' 들이 많이 들어와 질서가 없어지고 문화를 해친다" 며 대관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을 '고무신짝' 이라고 비하하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이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시장의 도움으로 대관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득실 댈 것이라던 세종문화회관 측의 예상과 달리 당시 정재계를 비롯한 고위층 인물들이 관람하러 왔고, 특히 4개 야당 총재들이 부부동반으로 직접 공연을 관람하러 오는 등 공연은 성황리를 이뤘다고 합니다. 이 후 이미자가 트로트 가수로서 처음 세종문화회관의 문턱을 넘으면서 남진이나 심수봉 같은 후배 가수들 역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로미나의 커버 영상을 접한 이미자가 그녀를 직접 수제자로 받아들였고, 콘서트 때마다 초청하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 문서 삭제식 이동(이미자(가수) → 이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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