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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모
김건모
金健模 | Kim Gun-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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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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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13일 (5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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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직할) 부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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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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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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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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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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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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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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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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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cm, 57kg, O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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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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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성대(1939년~2019년)
어머니 이선미(1944년 1월 16일) 형 김경모, 남동생 김현모 |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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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월국민학교 (1980 졸업)
화곡중학교 (1983 졸업) 화곡고등학교 (1986 졸업) 서울예술전문대학 (국악과 1986 / 전문학사) |
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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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 해군홍보단 (314기) 수병 만기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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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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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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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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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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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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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정규 1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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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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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가수, 한국의 스티비 원더, 김건반, 깜상, 연탄, 마른털, 쉰건모, 쉰둥이, 흑(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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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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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카, 드론, 게임, 킥보드,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종이접기, 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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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가수.
대한민국 최단 기간 최다 음반 판매량 기네스 기록 소유자에 골든디스크 최초 3회 연속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며, 1994년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와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까지 5대 가요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지상파에서 가요대상 시상이 사라진 현재 시점에서 이 기록을 보유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합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사랑하던 가수.
지상파 3사 연말 가요 시상식이 있던 시절 근접한 기록을 가졌던 가수들은 1997년과 1998년의 H.O.T.
, 1999년과 2000년의 조성모, 2001년의 god 등이 있습니다.
H.O.T.는 1997년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했지만 KBS는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고, 1998년은 KBS, MBC, SBS, 서울가요대상(젝스키스와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는 김종환이 대상을 받으면서 또 다시 실패했습니다.
조성모는 1999년 KBS, MBC,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핑클과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SBS는 핑클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했고, 2000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하였지만 KBS는 god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되고, 동시에 한 해 지상파 3사 그랜드슬램의 기록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됩니다.
god는 2001년에 KBS, MBC, SBS, 골든디스크를 석권했지만 서울가요대상은 김건모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2005년의 김종국은 KBS, MBC, SBS 지상파 3사 대상을 동시에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 대상을 SG워너비가 수상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서울가요대상은 아예 개최되지 않았습니다.
그 외 2005년까지 뮤직비디오 위주 시상식이었던 MKMF에서도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을 동방신기,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드렁큰 타이거가 수상하면서 김종국은 2005년 지상파 3사 이외의 시상식에서는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김종국은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최후의 그랜드슬램, 트리플 크라운 수상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KBS와 MBC는 2005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시상식이 폐지되었고, SBS도 2006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더 이상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시상이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레전드 3인방 중에서 가장 후배지만, 1968년생으로 이제는 나이가 상당해서 가수들 중에 고참급입니다.
핑계는 전국적으로 한국에 레게 음악이 유행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잘못된 만남은 역대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역사적인 기록을 올렸고, 그 외에도 히트곡이 즐비합니다.
작곡가 윤일상은 자신의 책 <나는 스무살입니다.
>에서 그가 음악적 능력에 있어서 조용필 다음으로 대단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수라고 평가했습니다.
대한민국 최단 기간 최다 음반 판매량 기네스 기록 소유자에 골든디스크 최초 3회 연속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며, 1994년 지상파 3사 연말 가요제와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까지 5대 가요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지상파에서 가요대상 시상이 사라진 현재 시점에서 이 기록을 보유한 가수는 김건모가 유일합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사랑하던 가수.
지상파 3사 연말 가요 시상식이 있던 시절 근접한 기록을 가졌던 가수들은 1997년과 1998년의 H.O.T.
, 1999년과 2000년의 조성모, 2001년의 god 등이 있습니다.
H.O.T.는 1997년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했지만 KBS는 임창정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고, 1998년은 KBS, MBC, SBS, 서울가요대상(젝스키스와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는 김종환이 대상을 받으면서 또 다시 실패했습니다.
조성모는 1999년 KBS, MBC,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핑클과 공동으로 수상)을 석권했지만 SBS는 핑클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했고, 2000년은 MBC, SBS,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을 석권하였지만 KBS는 god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 다시 실패하게 되고, 동시에 한 해 지상파 3사 그랜드슬램의 기록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됩니다.
god는 2001년에 KBS, MBC, SBS, 골든디스크를 석권했지만 서울가요대상은 김건모가 대상을 수상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2005년의 김종국은 KBS, MBC, SBS 지상파 3사 대상을 동시에 석권했지만 골든디스크 대상을 SG워너비가 수상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서울가요대상은 아예 개최되지 않았습니다.
그 외 2005년까지 뮤직비디오 위주 시상식이었던 MKMF에서도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을 동방신기,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드렁큰 타이거가 수상하면서 김종국은 2005년 지상파 3사 이외의 시상식에서는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김종국은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최후의 그랜드슬램, 트리플 크라운 수상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KBS와 MBC는 2005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시상식이 폐지되었고, SBS도 2006년 가요대상을 진행한 후 더 이상 지상파 3사 가요대상 시상이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레전드 3인방 중에서 가장 후배지만, 1968년생으로 이제는 나이가 상당해서 가수들 중에 고참급입니다.
핑계는 전국적으로 한국에 레게 음악이 유행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잘못된 만남은 역대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역사적인 기록을 올렸고, 그 외에도 히트곡이 즐비합니다.
작곡가 윤일상은 자신의 책 <나는 스무살입니다.
>에서 그가 음악적 능력에 있어서 조용필 다음으로 대단한 상상을 초월하는 가수라고 평가했습니다.
2. 역량
3. 가수 활동
김건모의 음악 인생은 '김창환 사단'의 첨병으로 국민가수급 인기를 얻은 1집에서 3집까지의 전기, 김창환을 떠나 역량있는 솔로 아티스트로 성장했던 4집에서 6집까지의 중기, 대중성의 제고를 위해 최준영과 손을 잡고 다시 반등한 7, 8집 이후의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4. 1~3집: 김창환 사단, 대한민국을 뒤흔든 국민가수
5. 4~6집: 성공적인 홀로서기, 하지만 떨어지는 뒷심
3집 활동 이후 그는 당대 가요계의 미다스의 손 김창환의 라인기획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가요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뮤지션으로서 지향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강력한 상업성으로 호불호가 존재하던 김창환에게서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을 위한 홀로서기에 나선 것.
결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프로듀싱한 4집 'Exchange'는 1996년의 별들의 전쟁 시기에 발매했고, 최준영, 솔리드의 정재윤 등과 손을 잡았습니다.
의외로 이 시기가 매우 큰 슬럼프였다고 하는데 2~3집 당시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한데다 김창환과 대판 싸우고 나가면서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쳐있었던 상태였고, 워낙 큰 히트를 연이어 기록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네가 김창환 떠나서 잘 될 것 같냐' '넌 김창환 덕에 뜬 거지 네 능력은 제로야'라는 말을 매우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수 생활을 은퇴해야 하나하는 기로에 설 정도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으나, '내 스스로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심혈을 기울여 앨범을 제작했다고 전해지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매 앨범마다 변화하던 그의 음악적 성향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감을 보내면서, 4집이 발매되자마자 타이틀곡 스피드를 비롯해서 제대로 된 활동이 없었던 수록곡들(미련, 악몽, 빨간우산)까지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크게 사랑받았습니다.
앨범 수록곡들도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과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방향을 적절히 섞어 많은 호평을 받았고, 김창환을 떠나도 그 스스로 훌륭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다만 타이틀곡에 있어서는 전작 '잘못된 만남'을 의식한 선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는데, 실제로 매번마다 조금씩 달라지던 타이틀곡의 패턴이 스피드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 다소 실망감을 나타낸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워낙 전에 다져놓은 기반이 단단했던 덕분에 스피드 역시도 골든컵 달성이 유력해 보였으나, 4주 1위를 달성하고 대기록을 세우기 직전 자신의 전 소속사의 신인 가수에게 정상 자리를 넘기는 바람에 조용필에 이어 정규앨범에서 4장 연속이자 4년 연속으로 골든컵 수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게 매우 큰 화제가 되었고 본인 인기의 하락세를 알리는 전환점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타 방송사에서도 3주 1위, 2주 1위에 그치는 바람에 1위 수상기록으로만 따지면 전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동명의 MBC 프로그램 오프닝 삽입곡으로 유명한 '테마게임'을 히트시켰고 또 다른 활동곡인 '악몽'과 '미련'도 준수한 인기를 얻으면서 160만 장의 높은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또한 KBS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최고가수상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3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핑계-잘못된 만남-스피드라는 최절정 전성기의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후 1997년 12월 발매된 5집 'Myself'에서는 최준영 대신 윤일상, 방시혁 등과 손잡으면서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음악적 방향도 바꾸었습니다.
앨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본격적인 프로듀서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앨범으로, 두 번째로 직접 프로듀싱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진보한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한 흑인 음악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으나,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사랑이 떠나가네'를 활동곡으로 선정하면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이전과는 조금 타이틀곡의 방향이 달라졌는데, 1~2집의 실험적 성향 타이틀곡, 3~4집의 트렌드에 맞춘 타이틀곡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5집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쿵짜자 쿵짝'거리는 트로트 비트를 기반으로 한 타이틀곡이었습니다.
사랑이 떠나가네 역시 마찬가지로 다소 올드한 느낌의 리듬이 쭉 이어집니다.
갑자기 올드한 느낌의 곡들로 활동방향이 바뀐 이유는 데뷔 초~최절정기인 1990년대 초중반에는 트렌디한 느낌의 재즈, 소울, 레게, 하우스 등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이 개척한 장르가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장르의 가수들이 급격하게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감이 있었고, 김건모 본인의 나이도 30대에 접어들면서 대중가요 주 소비층인 10~20대층에선 다소 밀려난 듯한 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핑계' '잘못된 만남'을 통해 트렌드에서 멀어졌었던 30~40대에도 큰 인기를 끌며 '국민가수' 타이틀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값을 바탕으로 상대적 고연령층을 타겟으로 방향을 살짝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전 3~4집만큼은 못 해도 초창기에 활동한 '당신만이'와 '사랑이 떠나가네'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각각 10, 3위까지 오르면서 선전했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쓸어담고 110만장을 판매하면서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2년 후인 1999년 11월 발매된 6집 'Growing'은 뛰어난 작품성과는 달리 49만 장에 불과한 저조한 판매량과 미비한 홍보로 대중적으로는 처절하게 묻혔고 가요 차트에선 10~20위 권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미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던 김건모는 그가 원하는 음악을 아낌없이 이 앨범을 통해 보여주었고, 왜 그가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앨범이었습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실패했지만 평단 역시 김건모의 변신과 새로운 시도에 호의적이었습니다.
다만 음악적으로는 현재까지도 3집과 더불어 그의 최고작으로까지 평가되는 6집이 상업적인 면에선 별다른 흥행을 하지 못하자, 그는 고심 끝에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뮤지션으로서 지향점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강력한 상업성으로 호불호가 존재하던 김창환에게서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을 위한 홀로서기에 나선 것.
결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프로듀싱한 4집 'Exchange'는 1996년의 별들의 전쟁 시기에 발매했고, 최준영, 솔리드의 정재윤 등과 손을 잡았습니다.
의외로 이 시기가 매우 큰 슬럼프였다고 하는데 2~3집 당시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한데다 김창환과 대판 싸우고 나가면서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지쳐있었던 상태였고, 워낙 큰 히트를 연이어 기록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네가 김창환 떠나서 잘 될 것 같냐' '넌 김창환 덕에 뜬 거지 네 능력은 제로야'라는 말을 매우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수 생활을 은퇴해야 하나하는 기로에 설 정도로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으나, '내 스스로 한번 보여줘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고 심혈을 기울여 앨범을 제작했다고 전해지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매 앨범마다 변화하던 그의 음악적 성향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신뢰감을 보내면서, 4집이 발매되자마자 타이틀곡 스피드를 비롯해서 제대로 된 활동이 없었던 수록곡들(미련, 악몽, 빨간우산)까지 차트에 이름을 올리며 크게 사랑받았습니다.
앨범 수록곡들도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과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방향을 적절히 섞어 많은 호평을 받았고, 김창환을 떠나도 그 스스로 훌륭한 수작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다만 타이틀곡에 있어서는 전작 '잘못된 만남'을 의식한 선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는데, 실제로 매번마다 조금씩 달라지던 타이틀곡의 패턴이 스피드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 다소 실망감을 나타낸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워낙 전에 다져놓은 기반이 단단했던 덕분에 스피드 역시도 골든컵 달성이 유력해 보였으나, 4주 1위를 달성하고 대기록을 세우기 직전 자신의 전 소속사의 신인 가수에게 정상 자리를 넘기는 바람에 조용필에 이어 정규앨범에서 4장 연속이자 4년 연속으로 골든컵 수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된 게 매우 큰 화제가 되었고 본인 인기의 하락세를 알리는 전환점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타 방송사에서도 3주 1위, 2주 1위에 그치는 바람에 1위 수상기록으로만 따지면 전작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동명의 MBC 프로그램 오프닝 삽입곡으로 유명한 '테마게임'을 히트시켰고 또 다른 활동곡인 '악몽'과 '미련'도 준수한 인기를 얻으면서 160만 장의 높은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또한 KBS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최고가수상과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3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핑계-잘못된 만남-스피드라는 최절정 전성기의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후 1997년 12월 발매된 5집 'Myself'에서는 최준영 대신 윤일상, 방시혁 등과 손잡으면서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음악적 방향도 바꾸었습니다.
앨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본격적인 프로듀서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앨범으로, 두 번째로 직접 프로듀싱했지만 이전보다 한층 진보한 재즈와 소울을 기반으로 한 흑인 음악의 색깔이 더욱 짙어지며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으나,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사랑이 떠나가네'를 활동곡으로 선정하면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이전과는 조금 타이틀곡의 방향이 달라졌는데, 1~2집의 실험적 성향 타이틀곡, 3~4집의 트렌드에 맞춘 타이틀곡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게 5집 타이틀곡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쿵짜자 쿵짝'거리는 트로트 비트를 기반으로 한 타이틀곡이었습니다.
사랑이 떠나가네 역시 마찬가지로 다소 올드한 느낌의 리듬이 쭉 이어집니다.
갑자기 올드한 느낌의 곡들로 활동방향이 바뀐 이유는 데뷔 초~최절정기인 1990년대 초중반에는 트렌디한 느낌의 재즈, 소울, 레게, 하우스 등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이 개척한 장르가 대세가 되면서 비슷한 장르의 가수들이 급격하게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감이 있었고, 김건모 본인의 나이도 30대에 접어들면서 대중가요 주 소비층인 10~20대층에선 다소 밀려난 듯한 인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핑계' '잘못된 만남'을 통해 트렌드에서 멀어졌었던 30~40대에도 큰 인기를 끌며 '국민가수' 타이틀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름값을 바탕으로 상대적 고연령층을 타겟으로 방향을 살짝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전 3~4집만큼은 못 해도 초창기에 활동한 '당신만이'와 '사랑이 떠나가네'는 가요톱텐 기준으로 각각 10, 3위까지 오르면서 선전했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쓸어담고 110만장을 판매하면서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으나, 2년 후인 1999년 11월 발매된 6집 'Growing'은 뛰어난 작품성과는 달리 49만 장에 불과한 저조한 판매량과 미비한 홍보로 대중적으로는 처절하게 묻혔고 가요 차트에선 10~20위 권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그럼에도 이 앨범은 그의 뮤지션으로서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미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라 있던 김건모는 그가 원하는 음악을 아낌없이 이 앨범을 통해 보여주었고, 왜 그가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는 평가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앨범이었습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실패했지만 평단 역시 김건모의 변신과 새로운 시도에 호의적이었습니다.
다만 음악적으로는 현재까지도 3집과 더불어 그의 최고작으로까지 평가되는 6집이 상업적인 면에선 별다른 흥행을 하지 못하자, 그는 고심 끝에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6. 7, 8집: 제2의 전성기, 마지막 불꽃
2001년 김건모는 4집 때 호흡을 맞췄던 최준영과 함께 대중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7집 'Another Days.
'에서 완벽히 재기하며 자신의 전성기였던 2~4집에 버금가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애절한 발라드 타이틀곡 미안해요와 코믹한 댄스곡 짱가,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 Double, 1964년 발표되어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성인가요 빗속의 여인까지 크게 인기를 얻으며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4집 이후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며 음악프로에서 여러 번 1위를 수상했습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의 3배 가까이 뛰어올라 143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 해 이미연의 연가(컴필레이션)와 god에 이어 최종 3위에 올라 다시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습니다.
한동안 뜸해졌던 예능계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해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반면 대중의 호응과는 별개로 활동곡인 '짱가'와 '빗속의 여인' 등에서 나타난 음악적인 퇴행은 음악 마니아들의 많은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이전까지 흑인 음악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면, 6집에서 실패를 맛본 이후 기존 행보와 너무나 반대되는 대중적인 행보에, 이미 데뷔 10년차로서 자신의 팬층 나이대가 올라간 것까지 감안하여 30~40대의 성인 취향의 곡들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리메이크곡 두 곡을 합해도 트랙 수는 9개에 불과했고, 실제 신곡은 겨우 7개에 그쳤습니다.
이전 5, 6집에서 15트랙까지 꽉꽉 수준 높은 곡들로 채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성도였고, 이쯤되면 대중가요 음반시장의 마지막 절정기로서 대부분의 가수들이 못해도 12트랙 이상, 많으면 20트랙 가까이 채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곡 수에 있어서도 날선 비판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스티비 원더'스러운 음악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팬들과 평단에서는 냉정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 MBC 음악캠프에서 문차일드의 '사랑하니까'에게 정상 자리를 넘겨준 직후, '음반판매량이 나의 1/10에 불과한 신인 가수가 어떻게 1위를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음악방송 순위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MBC 방송출연을 일절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방송사와 큰 마찰을 빚었습니다.
또 연예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대중적인 호감도를 크게 깎아먹었습니다.
이때 저지른 사건으로 김건모는 스타병에 걸린 유아독존 지멋대로의 연예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아직까지도 이 꼬리표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존재할 정도로 이미지를 크게 실추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대중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저랬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방송 순위는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수시로 바뀌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 순위의 기준점 때문에 공정성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문차일드의 소속사가 바로 그 유명한 김광수가 운영했던 GM기획이었으며, 이 소속사의 간판스타 조성모를 띄우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대형기획사에 의한 힘의 논리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었습니다.
또한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 반기를 든 대다수의 연예인은 그들을 움직이는 언론, 정권, 조폭계의 실세에 의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었던 경향이 강하며, 김건모 자신도 그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했습니다.
가요계의 거물이자 큰손인 만큼 그를 견제하는 정경계와 어둠의 세계에서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순위제 도입 때부터 2001년 상반기까지의 가요 순위제는 대부분 방송 횟수나 시청자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팬덤이 많은 가수들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음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중성의 지표는 그 당시로서는 음반 판매였지만, 이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1996년에 신승훈의 5집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 순위제에서는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투표라는게 조작이 매우 쉬운 분야고 인터넷이 덜 발달한 당시에는 그것이 더욱 쉬웠기 때문에 김건모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중들 또한 납득하기 매우 힘든 순위 결과였습니다.
그 뒤 음반과 음원 분야 점수는 2001년 하반기부터 도입되었으며 그 덕분에 2001~2004년까지는 아이돌보다는 비아이돌에게 1위가 많이 돌아갔습니다.
당장은 음악성과 인기를 등가교환한 셈이 되었고 위에 거론된 사건들과 이후 음반 시장의 침체로 7집이 그의 마지막 밀리언셀러가 되었지만, 한순간에 인기가 사그러들진 않았고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8집까지 지속됐습니다.
2003년 2월 발매한 8집 'History'에서는 앨범 메인 자켓에서 연탄사진을 실어 대놓고 올드 팬들을 겨냥한 듯한 인상을 주었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애절한 발라드곡 청첩장을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7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으로, '미안해요' - '청첩장'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라인을 비롯하여 '짱가' - 제비로 이어지는 코믹한 후속곡에, 심지어 오래된 고전가요를 리메이크하여 행사와 나이트 위주로 인기를 끌은 '빗속의 여인' - 아파트 라인까지 동일하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을 밀었던 'Double'과는 달리, 이미 댄스 장르가 사양화되던 시기였던지라 자전적 가사가 담긴 소울곡 My Son을 또다른 후속곡으로 삼았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앨범이었지만, 어릴적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가사로 실은 'My Son'은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방향성을 다시 살린 곡으로 높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7집에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지만, 순위제 방송사에선 많은 피해를 봐서 체감 인기와 음반 판매량에 비하면 1위 수상 기록은 매우 부실했는데 케이블 '쇼 뮤직탱크'에서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청첩장' 3주 1위, 지상파 SBS 인기가요에서 4월 6일 - 'My Son' 1위 수상이 전부였습니다.
일단 전작에서 MBC를 두 번이나 물먹인 전력이 있어서 음악캠프 측에서는 아예 1위를 할 수 없도록 대놓고 견제를 당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어찌저찌 MBC 화해를 했기 때문에 예능과 음악방송에 출연할 수는 있었지만 청첩장의 인기를 누를 정도로 막강한 경쟁자가 딱히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고작 1위 후보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KBS 뮤직뱅크에서는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1위가 가능한 지상파 방송은 오로지 SBS 인기가요 뿐이었음을 감안하면 8집도 어느 정도 많은 인기와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이틀곡 '청첩장'은 지상파 1위는 하지 못했으나 케이블 순위제 프로인 '쇼 뮤직탱크'에서는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3주 1위를 했으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도 높은 순위에 랭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김건모표 발라드에서도 자주 손꼽히는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속곡으로 선보인 '제비'는 순위제를 운영했던 음악캠프에서 1위 후보까지 오르는 등 선전했습니다.
이 앨범으로 대략 53만 장을 기록하면서 2003년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가져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는 앨범 발표 당해 년도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것은 1995년 잘못된 만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음반 산업의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김건모가 메이저에서 남길 수 있었던 '국민가수' 타이틀에 걸맞은 마지막 성적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8집 앨범이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한 해 동안 판매된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 단일 앨범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8집 앨범 활동을 마치고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음반시장의 악화와 방송활동과 음반홍보를 통한 후배 가수들과의 경쟁에 염증을 느끼고 공연활동으로만 팬들과 만날 것이라 밝히게 됩니다.
이 이유로 인해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와 음반 판매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골든디스크 대상이 99% 확실시 되었음에도 불참하면서 수상자리를 조성모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조성모는 당시 <피아노>를 타이틀 곡으로 한 5집 <가인>으로 4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2003년 음반 판매량 3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2위 이수영의 경우 앨범이 8월에 발매되어 12월에 들어서 조성모 앨범판매량을 추월했고, 골든디스크 음반판매량 집계 기준은 2002년 12월~2003년 11월까지였습니다.
따라서 김건모가 불참, 이수영이 역전 직전의 상황에서 3위였던 조성모가 정말 운 좋게 간신히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성모가 수상 소감으로 방송에서 은퇴하셨지만 이제 콘서트장에서 그를 열렬히 사랑해 주시기 바란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에서 완벽히 재기하며 자신의 전성기였던 2~4집에 버금가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애절한 발라드 타이틀곡 미안해요와 코믹한 댄스곡 짱가,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 Double, 1964년 발표되어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성인가요 빗속의 여인까지 크게 인기를 얻으며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아, 4집 이후 가장 큰 인기를 누리며 음악프로에서 여러 번 1위를 수상했습니다.
앨범 판매량도 전작의 3배 가까이 뛰어올라 143만 장이라는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그 해 이미연의 연가(컴필레이션)와 god에 이어 최종 3위에 올라 다시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습니다.
한동안 뜸해졌던 예능계에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해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반면 대중의 호응과는 별개로 활동곡인 '짱가'와 '빗속의 여인' 등에서 나타난 음악적인 퇴행은 음악 마니아들의 많은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이전까지 흑인 음악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길을 걸었다면, 6집에서 실패를 맛본 이후 기존 행보와 너무나 반대되는 대중적인 행보에, 이미 데뷔 10년차로서 자신의 팬층 나이대가 올라간 것까지 감안하여 30~40대의 성인 취향의 곡들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리메이크곡 두 곡을 합해도 트랙 수는 9개에 불과했고, 실제 신곡은 겨우 7개에 그쳤습니다.
이전 5, 6집에서 15트랙까지 꽉꽉 수준 높은 곡들로 채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성도였고, 이쯤되면 대중가요 음반시장의 마지막 절정기로서 대부분의 가수들이 못해도 12트랙 이상, 많으면 20트랙 가까이 채우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곡 수에 있어서도 날선 비판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었던 '스티비 원더'스러운 음악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팬들과 평단에서는 냉정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 MBC 음악캠프에서 문차일드의 '사랑하니까'에게 정상 자리를 넘겨준 직후, '음반판매량이 나의 1/10에 불과한 신인 가수가 어떻게 1위를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음악방송 순위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MBC 방송출연을 일절 거부하겠다고 선언해 방송사와 큰 마찰을 빚었습니다.
또 연예계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인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대중적인 호감도를 크게 깎아먹었습니다.
이때 저지른 사건으로 김건모는 스타병에 걸린 유아독존 지멋대로의 연예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아직까지도 이 꼬리표로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존재할 정도로 이미지를 크게 실추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대중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는 저랬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방송 순위는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수시로 바뀌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 순위의 기준점 때문에 공정성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문차일드의 소속사가 바로 그 유명한 김광수가 운영했던 GM기획이었으며, 이 소속사의 간판스타 조성모를 띄우기 위해 별짓을 다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대형기획사에 의한 힘의 논리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었습니다.
또한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에 반기를 든 대다수의 연예인은 그들을 움직이는 언론, 정권, 조폭계의 실세에 의한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출연했었던 경향이 강하며, 김건모 자신도 그들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했습니다.
가요계의 거물이자 큰손인 만큼 그를 견제하는 정경계와 어둠의 세계에서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순위제 도입 때부터 2001년 상반기까지의 가요 순위제는 대부분 방송 횟수나 시청자 투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팬덤이 많은 가수들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음원이 차지하고 있는 대중성의 지표는 그 당시로서는 음반 판매였지만, 이는 거의 반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예로 1996년에 신승훈의 5집이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요 순위제에서는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투표라는게 조작이 매우 쉬운 분야고 인터넷이 덜 발달한 당시에는 그것이 더욱 쉬웠기 때문에 김건모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대중들 또한 납득하기 매우 힘든 순위 결과였습니다.
그 뒤 음반과 음원 분야 점수는 2001년 하반기부터 도입되었으며 그 덕분에 2001~2004년까지는 아이돌보다는 비아이돌에게 1위가 많이 돌아갔습니다.
당장은 음악성과 인기를 등가교환한 셈이 되었고 위에 거론된 사건들과 이후 음반 시장의 침체로 7집이 그의 마지막 밀리언셀러가 되었지만, 한순간에 인기가 사그러들진 않았고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8집까지 지속됐습니다.
2003년 2월 발매한 8집 'History'에서는 앨범 메인 자켓에서 연탄사진을 실어 대놓고 올드 팬들을 겨냥한 듯한 인상을 주었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애절한 발라드곡 청첩장을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7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앨범으로, '미안해요' - '청첩장'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라인을 비롯하여 '짱가' - 제비로 이어지는 코믹한 후속곡에, 심지어 오래된 고전가요를 리메이크하여 행사와 나이트 위주로 인기를 끌은 '빗속의 여인' - 아파트 라인까지 동일하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테크노 기반의 트렌디한 댄스곡을 밀었던 'Double'과는 달리, 이미 댄스 장르가 사양화되던 시기였던지라 자전적 가사가 담긴 소울곡 My Son을 또다른 후속곡으로 삼았습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앨범이었지만, 어릴적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가사로 실은 'My Son'은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방향성을 다시 살린 곡으로 높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7집에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통해 대중적인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지만, 순위제 방송사에선 많은 피해를 봐서 체감 인기와 음반 판매량에 비하면 1위 수상 기록은 매우 부실했는데 케이블 '쇼 뮤직탱크'에서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청첩장' 3주 1위, 지상파 SBS 인기가요에서 4월 6일 - 'My Son' 1위 수상이 전부였습니다.
일단 전작에서 MBC를 두 번이나 물먹인 전력이 있어서 음악캠프 측에서는 아예 1위를 할 수 없도록 대놓고 견제를 당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어찌저찌 MBC 화해를 했기 때문에 예능과 음악방송에 출연할 수는 있었지만 청첩장의 인기를 누를 정도로 막강한 경쟁자가 딱히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고작 1위 후보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KBS 뮤직뱅크에서는 순위제를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1위가 가능한 지상파 방송은 오로지 SBS 인기가요 뿐이었음을 감안하면 8집도 어느 정도 많은 인기와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이틀곡 '청첩장'은 지상파 1위는 하지 못했으나 케이블 순위제 프로인 '쇼 뮤직탱크'에서는 2003년 4월 5일~19일까지 3주 1위를 했으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도 높은 순위에 랭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김건모표 발라드에서도 자주 손꼽히는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속곡으로 선보인 '제비'는 순위제를 운영했던 음악캠프에서 1위 후보까지 오르는 등 선전했습니다.
이 앨범으로 대략 53만 장을 기록하면서 2003년 전체 음반판매량 1위를 가져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는 앨범 발표 당해 년도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한 것은 1995년 잘못된 만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음반 산업의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김건모가 메이저에서 남길 수 있었던 '국민가수' 타이틀에 걸맞은 마지막 성적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8집 앨범이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한 해 동안 판매된 마지막 하프 밀리언셀러 단일 앨범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그의 커리어에 있어서 다시 한 번 큰 전환점이 되었는데, 8집 앨범 활동을 마치고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음반시장의 악화와 방송활동과 음반홍보를 통한 후배 가수들과의 경쟁에 염증을 느끼고 공연활동으로만 팬들과 만날 것이라 밝히게 됩니다.
이 이유로 인해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와 음반 판매고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에서 1위를 많이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골든디스크 대상이 99% 확실시 되었음에도 불참하면서 수상자리를 조성모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조성모는 당시 <피아노>를 타이틀 곡으로 한 5집 <가인>으로 4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2003년 음반 판매량 3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2위 이수영의 경우 앨범이 8월에 발매되어 12월에 들어서 조성모 앨범판매량을 추월했고, 골든디스크 음반판매량 집계 기준은 2002년 12월~2003년 11월까지였습니다.
따라서 김건모가 불참, 이수영이 역전 직전의 상황에서 3위였던 조성모가 정말 운 좋게 간신히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성모가 수상 소감으로 방송에서 은퇴하셨지만 이제 콘서트장에서 그를 열렬히 사랑해 주시기 바란다고 아쉬운 마음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7. 9~13집
어느 예능 출연 중 MC가 PD에게 "게스트들이 힘들어하니 좀 쉬었다하자"라고 말하자 PD가 "쉬긴 뭘 쉬어.
쉬고 싶으면 뽑아 먹을 거 빨리 뽑아먹고 보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방송활동 은퇴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를 2015년 1월 라디오 스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트렌드가 바뀐 음반생태에 있어 방송활동을 제하고 히트를 기록하는 것은 그 김건모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8집의 경우 그래도 일부 예능에서는 출연을 했지만, 바로 다음 해 발매된 9집이 전작의 1/10 수준으로 판매량이 줄고 타이틀곡인 '잔소리'도 다소 묻히게 되자 결국 방송활동 은퇴 선언을 2년 만에 번복하고 2005년에 방송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듯.
하지만 7~8집에서 대중적 인기를 상당히 의식했던 행보와는 반대로 방송 중단을 선언하면서 그의 음악적 행보는 완전히 극초창기 또는 6집 비견할 만한 수준으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9~10집이 김건모 음악 커리어의 전성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적인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준 9집과 10집은 팬들과 평단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비운의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9집의 경우 방송활동 중단이라는 행보와는 걸맞지 않게 전작의 구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 다소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였으나, 10집은 김건모의 팬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이견 없이 완벽한 앨범으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쏟아놓은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앨범입니다.
실제로 그가 처음으로 프로듀싱을 맡았던 4~6집 시기와 비교해서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입니다.
이때는 자신이 원하는 장르의 곡과 대중성을 의식한 곡을 적절히 분배하고, 흑인 음악 성향의 곡들도 1~2곡을 제외하면 대중성을 모토로 말랑말랑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10집에 이르러서는 대중성을 의식한 하이브리드화를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재즈, 블루스, 소울 장르 본연의 색깔에 집중하여 미국 본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 가장 '흑인음악 본연에 가까운' 농도 짙은 곡들 뿐이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발라드&댄스곡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통 재즈, 블루스, 소울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한국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보석이라고 표현할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의 역대 앨범 커리어 중 가장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앨범이어서,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받지만 경우에 따라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의견도 일부 보이는 편입니다.
이 시기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곡은 2년 만에 방송 복귀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선보인 10집 타이틀곡 서울의 달입니다.
블루스와 재즈를 적절히 섞은 이 노래는 기존의 발라드&댄스로 묶일 수 있었던 그의 활동곡들과는 엄연히 차별화되는 곡이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못 얻고 그냥 김건모가 간만에 좋은 노래 들고 왔네 수준으로 기억되다가 201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빛을 보며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원 차트, 노래방에서 스테디 셀러로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건모 본인도 공연을 나갈 때 '잘못된 만남'과 함께 꼭 챙기는 곡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의 달'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장르의 곡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곡으로, 뒤늦게나마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고 밝히며 현재도 강한 애착을 보이는 곡입니다.
계속되는 미진한 상업적 성취에 좌절한 김건모는 2008년 다시 김창환에게 돌아가 프로듀싱을 맡기는 초강수를 두며 12집과 13집을 발매했지만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4년 10월' 3년 만에 14집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앨범 작업이 늦어지며 연기되었다가 2016년 11월 19일, 신곡 1곡과 기존 곡을 리마스터링하여 듀엣으로 나눠 부른 미니앨범을 발매했습니다.
발매 3주 전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르는 것이 방송되며 일종의 선공개(?) 프로모션이 이루어졌습니다.
제목은 《다 당신 덕분이라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노년 부부의 이야기를 풀어낸 노래로 차이라면 노부부 이야기는 아내 혹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남편 혹은 아내의 이야기라면 다 당신 덕분이라오는 두 부부가 당신이 있어 지금껏 살아왔다고 고마워하는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미우새 선공개 때 어머니들 모두가 찡해 하셨다.
쉬고 싶으면 뽑아 먹을 거 빨리 뽑아먹고 보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방송활동 은퇴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를 2015년 1월 라디오 스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트렌드가 바뀐 음반생태에 있어 방송활동을 제하고 히트를 기록하는 것은 그 김건모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8집의 경우 그래도 일부 예능에서는 출연을 했지만, 바로 다음 해 발매된 9집이 전작의 1/10 수준으로 판매량이 줄고 타이틀곡인 '잔소리'도 다소 묻히게 되자 결국 방송활동 은퇴 선언을 2년 만에 번복하고 2005년에 방송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듯.
하지만 7~8집에서 대중적 인기를 상당히 의식했던 행보와는 반대로 방송 중단을 선언하면서 그의 음악적 행보는 완전히 극초창기 또는 6집 비견할 만한 수준으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9~10집이 김건모 음악 커리어의 전성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적인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준 9집과 10집은 팬들과 평단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으며 비운의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9집의 경우 방송활동 중단이라는 행보와는 걸맞지 않게 전작의 구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 다소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였으나, 10집은 김건모의 팬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이견 없이 완벽한 앨범으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쏟아놓은 최고의 명작으로 칭송받는 앨범입니다.
실제로 그가 처음으로 프로듀싱을 맡았던 4~6집 시기와 비교해서도 차이가 많이 나는 편입니다.
이때는 자신이 원하는 장르의 곡과 대중성을 의식한 곡을 적절히 분배하고, 흑인 음악 성향의 곡들도 1~2곡을 제외하면 대중성을 모토로 말랑말랑하게 분위기를 바꾸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10집에 이르러서는 대중성을 의식한 하이브리드화를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재즈, 블루스, 소울 장르 본연의 색깔에 집중하여 미국 본토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 가장 '흑인음악 본연에 가까운' 농도 짙은 곡들 뿐이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발라드&댄스곡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통 재즈, 블루스, 소울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한국 가요계에서 찾기 힘든 보석이라고 표현할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의 역대 앨범 커리어 중 가장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앨범이어서,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받지만 경우에 따라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의견도 일부 보이는 편입니다.
이 시기에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곡은 2년 만에 방송 복귀하며 대중들에게 모습을 선보인 10집 타이틀곡 서울의 달입니다.
블루스와 재즈를 적절히 섞은 이 노래는 기존의 발라드&댄스로 묶일 수 있었던 그의 활동곡들과는 엄연히 차별화되는 곡이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를 못 얻고 그냥 김건모가 간만에 좋은 노래 들고 왔네 수준으로 기억되다가 201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빛을 보며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원 차트, 노래방에서 스테디 셀러로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건모 본인도 공연을 나갈 때 '잘못된 만남'과 함께 꼭 챙기는 곡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의 달'이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장르의 곡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곡으로, 뒤늦게나마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이 정말 감사하다고 밝히며 현재도 강한 애착을 보이는 곡입니다.
계속되는 미진한 상업적 성취에 좌절한 김건모는 2008년 다시 김창환에게 돌아가 프로듀싱을 맡기는 초강수를 두며 12집과 13집을 발매했지만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4년 10월' 3년 만에 14집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앨범 작업이 늦어지며 연기되었다가 2016년 11월 19일, 신곡 1곡과 기존 곡을 리마스터링하여 듀엣으로 나눠 부른 미니앨범을 발매했습니다.
발매 3주 전 SBS 미운 우리 새끼에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르는 것이 방송되며 일종의 선공개(?) 프로모션이 이루어졌습니다.
제목은 《다 당신 덕분이라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노년 부부의 이야기를 풀어낸 노래로 차이라면 노부부 이야기는 아내 혹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남편 혹은 아내의 이야기라면 다 당신 덕분이라오는 두 부부가 당신이 있어 지금껏 살아왔다고 고마워하는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미우새 선공개 때 어머니들 모두가 찡해 하셨다.
8. 수상 내역
- 1993년최우수 신인가수상제4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 랩댄스부문제8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KBS 가요대상 10대 가수상
- 최우수 신인가수상
- 제4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 랩댄스부문
- 제8회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
- KBS 가요대상 10대 가수상
- 1994년연예영화신문 신세대가수상제5회 서울가요대상 랩댄스부문상, 대상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KBS 가요대상 대상KBS 가수상 최고히트곡상MBC 한국가요제전 최고인기가요상SBS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
- 연예영화신문 신세대가수상
- 제5회 서울가요대상 랩댄스부문상, 대상
-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 KBS 가수상 최고히트곡상
- MBC 한국가요제전 최고인기가요상
- SBS 스타상 가수부문 대상
- 1995년제22회 한국방송대상 남자가수상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KBS 가요대상 대상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최우수상 (가수 부문)문화체육부장관 표창한국최고인기연예대상 대상
- 제22회 한국방송대상 남자가수상
-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최우수상 (가수 부문)
- 문화체육부장관 표창
- 한국최고인기연예대상 대상
- 1996년제7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KBS 가요대상 대상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청소년 가수상KMTV 가요대전 대상MBC 한국가요제전 최고인기가요상
- 제7회 서울가요대상 10대 가수상
-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대상
- KBS 가요대상 대상
- 제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청소년 가수상
- KMTV 가요대전 대상
- MBC 한국가요제전 최고인기가요상
- 1998년KBS 가요대상 작곡상 사랑이 떠나가네제13회 골든디스크상 본상
- KBS 가요대상 작곡상 사랑이 떠나가네
- 제13회 골든디스크상 본상
- 2001년제12회 서울가요대상 대상제16회 골든디스크상 본상제35회 가수의 날 올해의 남자가수상SBS 가요대전 프로듀서 선정 최우수 가수상KBS 가요대상 청소년 선정 최고 인기상MBC 10대 가수 가요제 본상
- 제12회 서울가요대상 대상
- 제16회 골든디스크상 본상
- 제35회 가수의 날 올해의 남자가수상
- SBS 가요대전 프로듀서 선정 최우수 가수상
- KBS 가요대상 청소년 선정 최고 인기상
- MBC 10대 가수 가요제 본상
- 2008년제16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신세대가요 10대 가수상
- 제16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신세대가요 10대 가수상
- 2011년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 2016년2016 SBS SAF 연예대상 토크쇼부문 최우수상
- 2016 SBS SAF 연예대상 토크쇼부문 최우수상
9.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79회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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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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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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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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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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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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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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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인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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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2회) |
데뷔 첫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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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
1위
(통산 2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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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
KBS 가요톱10
|
첫인상
(5회) |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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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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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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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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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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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5주 연속, 골든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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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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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핑계
(15회) |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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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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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가요톱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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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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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
KBS 가요톱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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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
3월 2일
|
KBS 가요톱10
|
||
3월 6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
3월 9일
|
KBS 가요톱10
|
||
3월 13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
3월 16일
|
KBS 가요톱10
|
1위
(5주 연속, 골든컵) |
|
3월 20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1위
|
|
3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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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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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
SBS 스타 서울 스타
|
1위
(9주 연속, 최다 1위) |
|
4월 24일
|
SBS TV 가요 20
|
1위
|
|
19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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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
KMTV 쇼! 뮤직탱크
|
잘못된 만남
(18회) |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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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
SBS TV 가요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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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
KBS 가요톱10
|
||
3월 18일
|
KMTV 쇼! 뮤직탱크
|
||
3월 19일
|
SBS TV 가요 20
|
||
3월 22일
|
KBS 가요톱10
|
||
3월 25일
|
KMTV 쇼! 뮤직탱크
|
||
3월 26일
|
SBS TV 가요 20
|
||
3월 29일
|
KBS 가요톱10
|
||
4월 1일
|
KMTV 쇼! 뮤직탱크
|
||
4월 2일
|
SBS TV 가요 20
|
||
4월 5일
|
KBS 가요톱10
|
||
4월 8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5주 연속, 최강자) |
|
4월 9일
|
SBS TV 가요 20
|
1위
|
|
4월 12일
|
KBS 가요톱10
|
1위
(5주 연속, 골든컵) |
|
4월 16일
|
SBS TV 가요 20
|
1위
(6주 연속, 당해 최다 1위) |
|
4월 21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1위
|
|
4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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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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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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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14회) |
1위
|
6월 12일
|
KBS 가요톱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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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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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
6월 22일
|
KMTV 쇼! 뮤직탱크
|
||
6월 29일
|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
||
6월 29일
|
KMTV 쇼! 뮤직탱크
|
||
6월 30일
|
SBS TV 가요 20
|
||
7월 3일
|
KBS 가요톱10
|
||
7월 6일
|
KMTV 쇼! 뮤직탱크
|
||
7월 7일
|
SBS TV 가요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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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
KBS 가요톱10
|
1위
(4주 연속) |
|
7월 13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
|
7월 20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5주 연속, 최강자) |
|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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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
MBC 젊은그대
|
사랑이 떠나가네
(1회) |
1위
|
3월 18일
|
KBS 브라보 신세대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6회) |
|
3월 25일
|
KBS 브라보 신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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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
KBS 브라보 신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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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
KMTV 쇼! 뮤직탱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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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
KBS 브라보 신세대
|
||
4월 15일
|
KBS 브라보 신세대
|
||
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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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
MBC 음악캠프
|
미안해요
(11회) |
1위
|
7월 5일
|
KBS 뮤직뱅크
|
||
7월 7일
|
MBC 음악캠프
|
||
7월 12일
|
KBS 뮤직뱅크
|
||
7월 13일
|
KMTV 쇼! 뮤직탱크
|
||
7월 14일
|
MBC 음악캠프
|
||
7월 19일
|
KBS 뮤직뱅크
|
1위
(3주 연속, 골든컵) |
|
7월 20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
|
7월 21일
|
MBC 음악캠프
|
||
7월 27일
|
KMTV 쇼! 뮤직탱크
|
1위
(3주 연속) |
|
7월 28일
|
MBC 음악캠프
|
1위
(4주 연속, 통산 5주) |
|
7월 8일
|
SBS 인기가요
|
짱가
(3회) |
1위
|
7월 15일
|
|||
7월 22일
|
1위
(3주 연속, 왕중왕) |
||
2003년
|
|||
4월 4일
|
KMTV 쇼! 뮤직탱크
|
청첩장
(3회) |
1위
|
4월 11일
|
|||
4월 18일
|
1위
(3주 연속) |
||
4월 6일
|
SBS 인기가요
|
My Son
(1회) |
뮤티즌 송
|
10. 이야기들
- 소문난 애주가다. 하지만 소주만을 좋아하고 마신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인터뷰에서는 담배는 끊을 수 있지만 술은 못 끊는다고 했고, 세바퀴에 출연했을 때 부부싸움의 기술이라는 코너에서 상대역인 한성주와 '성형 수술하고싶은 여자 Vs. 안된다고 반대하는 남자'라는 컨셉으로 대결할 때, 한성주가 별의 별 이유를 대면서 성형 수술을 하고 싶다고 해도 끝까지 안된다고 하다가, 한성주가 최후의 수단으로 오빠 나 그럼 성형수술 포기할 테니까 오빠도 술 끊어라는 말에 단번에 ....수술해!라고 말할 정도다. 심지어 미우새를 보면 집에 소주 전용 냉장고에다가 소주 전용 정수기를 장만한 것도 모자라, 여름 한정용으로 소주 얼음을 갈아 소주 팥빙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선블루 CF모델로도 활동하기까지 했습니다.
- 동시에 애연가로, 하루에 한 갑 반 가량을 피웁니다. 태우는 담배의 종류는 말보로다.
- 후배 성시경이 "형은 어떻게 술이랑 담배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 녹음과 라이브를 한결같은 목소리로 유지할 수 있어요?"고 묻자 녹음할 때도 술을 마시면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 첫사랑이 1993년 '핑계' 활동 때라고 하며 박진영의 소개로 맺어진 인연이었습니다. 2년 가량을 연애했지만 잊는 데는 9년이 걸렸습니다. 7집까지의 모든 사랑 노래를 그 여성을 생각하며 부르다가 8집 녹음을 하는데 그제서야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대한민국 해군 해군홍보단 연예병이었습니다. 김용만과 지석진이 김건모의 1년 선임이었습니다.김건모 김용만 지석진 "해군 시절 함께 죽을 뻔"현재의 문화 홍보병으로 박보검이 현재 이로 복무중입니다.
- 해피투게더 쟁반노래방에 출연하고 싶어했고 결국 8집 앨범이 나온 후인 2003년 4월 출연했습니다. 이 때 2절까지 아는 노래가 나온 덕에 단 2번만에 성공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방송시간이 모자라는 바람에 노래를 한 곡 더 불렀습니다.
- 동생 김현모가 한때 게임 제작 사업(이야기 소프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판타지 포유를 만들어 본인도 홍보 모델로 활약한 적 있었는데 이때가 게임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된 계기였다고 합니다.
- 와우저이기도 하며,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발매기념 파티에 초대가수로 나와 잘못된 만남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본인의 실제 캐릭터를 백댄서로 세우기도 했습니다. 다른 구도 영상. 인남캐 사냥꾼을 플레이하며, 레이드보단 전장을 즐긴다는 듯합니다.
- 클래시 오브 클랜과 클래시 로얄의 유저다. 정모도 나가고 방송과 상관없이 항상 태블릿에 게임을 켜놓고 있습니다.
- 까무잡잡한 피부색, 작지만 단단한 체격 때문에 '까만콩'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1 2 이러한 특징 때문에 북한 출신의 김정남이 유럽코리아재단과 주고받은 메일에서 장성택의 신상묘사 중 김정남의 표현을 빌리면 '시커멓게 생긴' 사람의 비유명사로 뜬금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 2014년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 출연해서 실력 검증용 노래방 기기 점수 측정에서, 유일하게 한 번에 100점을 받으면서 실력이 변치 않음을 보였습니다. 또한 같은 프로에서 김건모가 드라이 리허설을 한다는 것이 프로그램 내에서 화제였는데 그가 전성기일 때는 리허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서 오자마자 노래 부르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쨌든 1990년대 가요계를 휩쓴 끝판왕답게 본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사랑이 떠나가네", "잘못된 만남" 총 3곡을 부르면서 관객들 및 시청자들을 열광시켰습니다. 특히 잘못된 만남에서 대기실에 있던 무도 멤버 및 가수들이 총출동, 단체 댄스를 추면서 대미를 장식한 장면이 압권. 공연 끝나고 하하의 가게에서 뒤풀이할 때 회식값 절반을 혼자 냈다고 합니다.
- 콘서트나 무대 때에는 굉장히 예민해지고 짜증도 많이 낸다고 합니다. 특히 콘서트의 경우 자신의 음악적 기질까지 더해서 스태프들을 굉장히 많이 갈구는 듯합니다. 2016년 8월 라디오스타에서 경리가 데뷔 전 김건모의 콘서트에서 백댄서로 무대에 섰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구라가 "그때 많이 힘들었죠?"라고 묻자. 경리가 바로 "네 힘들었죠..."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미우새에서 공개된 5년만의 단독 콘서트 때도 여지없이 세션 팀들을 신나게 갈궈줍니다. 근데 잘 들어보면 세션 팀이 리허설 때 연주를 엉망으로 해서 반주 인이어 모니터링이 하나도 안 되어서다. 실제로 자세히 들어보면 멜로디 라인이 하나도 안 나왔습니다. 이상하게 웅얼웅얼 벙벙대는 소리만 들립니다.
- KBS에서 방영되었던 만화 원피스에서 남자 단역으로 우정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원피스의 롤로노아 조로 역할인 김승준과 대학 동기라 녹음실에 만나러 갔는데 한참 녹음 중이던 김승준이 단역 하나 해 보고 가라고 해서, 그걸 또 하고 갔다고 합니다. KBS 2TV 원피스 19화 가수 김건모 - 남자 3 役 바로, 롤로노아 조로가 어릴적 대련했던 남자 관원 목소리인데, 3초 정도 나오는데다 대사도 짤막한 비명 뿐입니다.
- 얼리어답터다. 미우새 방송에서, 아이패드 에어 2 2대를 들고 있고, 서피스 프로 4 또한 가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 전동 스쿠터를 3대, 몰튼 자전거를 9대 보유 중입니다.
- 미우새 2017년 3월 24일 방영분에서 드론 39대를 가지고 있음이 보였고, 후에 드론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후에 전라남도 곡성군 건모마을에서 드론으로 농경지에 물을 주며 일손을 돕는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전국투어 콘서트에는 관객들에게 드론을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 RC카를 여러 대 소유하고 있으며, RC카 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 RC카 덕에 코미디언 권재관과 의외의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권재관의 증언에 의하면 개그콘서트의 열혈 팬이라고...
- 가요계에서 엄청난 실력과 경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예능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대가수라고 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가식 없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실 김건모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가수면 으레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예능출연을 자제하거나 출연하더라도 무게를 잡는 것이 보통인데 김건모는 태생적으로 웃기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가차없이 망가집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웃음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 상당한 배트맨 덕후로 배트맨 티셔츠는 수도 없이 많으며, 피규어에다 가면까지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 그가 찍은 LG화학 발코니 전용창 CF가 있으며, 상당히 병맛이 넘칩니다. CF 1 CF 2
- 김건모가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는 팀의 '사랑합니다',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김장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고 합니다.
- 오랜 자취 경력으로 요리 실력이 상당합니다.
- 롤러스케이트 역시 김건모의 취미인데, 일산의 한 롤러장에 자주 모습을 보입니다.
- 2019년 10월 30일, 13세 연하 일반인 여성 장지연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습니다. 김건모 내년 결혼 30대 피아니스트와 1년 열애 결실 예비 신부는 작곡가, 가수이자 목사인 장욱조의 딸이자 배우 장희웅의 동생입니다. 장희웅의 입장에서 보면 첫 상견례 때 대선배에게 형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상당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어서 5월 말 작고한 아버지의 선물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했습니다. 이후 혼인신고도 했다는 소식도 밝히면서 법적으로 유부남이 되었고, 결혼식 날짜도 발표했으나, 지인들의 참석 요청이 많아 식장을 변경한다는 이유로 4개월 뒤로 결혼식을 미뤘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모종의 사유로 결혼식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결국 2022년 6월 10일, 한 매체의 단독 보도로 2년 8개월만에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티브이데일리, 스포츠경향. 유튜버 이진호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결혼식도 못 하게 된 그 이유 때문에 김건모의 모친 이선미 여사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그 일로 세상에 환멸을 느낀 김건모가 먼저 아내에게 별거 후 이혼을 요구했으나 아내는 당연히 싫다고 하였고, 결국 1년 뒤 김건모가 원하는 대로 갈라서기로 했다고 합니다.
11. 나는 가수다
나는 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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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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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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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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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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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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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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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짙게 바르고 - 임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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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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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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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My Lady - 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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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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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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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쇼
|
서울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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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B조
|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 유재하
|
상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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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가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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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 정태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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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B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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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당신 곁으로 - 김정수
|
하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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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고별가수전
|
다행이다 -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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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B조
|
I Can Wait Forever - Air Supply
|
하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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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고별가수전
|
어떤이의 꿈 - 봄여름가을겨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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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A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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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 - 故 김광석
|
상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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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가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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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 변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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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하차
|
- 나가수에서 불려진 김건모 곡
김건모,이혼,장지연,근황,무죄,무혐의,노래,엄마,잘못된 만남,자녀,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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