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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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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2월 13일 (8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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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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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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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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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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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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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cm, 82kg, A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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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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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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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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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찬숙, 어머니 이계수
3남 4녀 중 여섯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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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오효순
아들 김정준, 딸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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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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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립 시조중학교 (졸업)
교토부립 가쓰라고등학교 (졸업) 동아대학교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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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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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1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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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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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투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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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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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부 (1961)
기업은행 (1962~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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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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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상업고등학교 감독 (1969~1970)
기업은행 투수코치 (1970~1971) 기업은행 감독 (1972~1975) 충암고등학교 감독 (1976~1979) 신일고등학교 감독 (1979~1981) OB 베어스 투수코치 (1982~1983) OB 베어스 감독 (1984~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9~1990)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1~1992)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4~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6~1999)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 LG 트윈스 2군 감독 (2001)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1) LG 트윈스 감독대행 (2001) LG 트윈스 감독 (2002)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 (2006) SK 와이번스 감독 (2007~2011) 고양 원더스 감독 (2012~2014) 한화 이글스 감독 (2015~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부 특별 어드바이저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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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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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슬러 (20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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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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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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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
前 KBO 리그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감독이자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런트 및 코치를 역임했습니다.
2022년 10월 16일, 50년의 다사다난 했던 코치, 감독 등 지도자 커리어를 접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던 2022 시즌을 기준으로 79세(실제 만 나이로는 81세를 보름 앞둔 우리나이 82세), 일본프로야구 전체 구단 중 최고령 지도자였습니다.
前 KBO 리그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감독이자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런트 및 코치를 역임했습니다.
2022년 10월 16일, 50년의 다사다난 했던 코치, 감독 등 지도자 커리어를 접고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던 2022 시즌을 기준으로 79세(실제 만 나이로는 81세를 보름 앞둔 우리나이 82세), 일본프로야구 전체 구단 중 최고령 지도자였습니다.
2. 상세
2000년대 후반 SK에서 우승을 하면서 야신으로 불리며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는 등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말년에 한화에서 대실패를 겪는 과정에서 그 동안 가려졌던 부정적인 이면들과 과거에 저지른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나쁜 의미로 재평가를 받고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부터 불펜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구사했고 이는 2000년대 후반 SK 감독시절 이른바 '벌떼야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감독 커리어 전반기에는 태평양, 쌍방울을 맡아 특유의 쥐어짜기식 혹사 운영으로 하위권이었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여 하위권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데 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OB, 삼성 등 강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쌍방울 시절은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하위권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 팬들에 의해 '김성근의 쌍방울 신화'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쌍방울이 무척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쌍방울은 오히려 선수 연봉 총액 1위 구단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선수들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그가 퇴임한 후 예외없이 암흑기에 빠져들었습니다.
2002년 LG가 정규순위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3위, 2위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포스트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을 거치는 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탈락했기 때문에 단기전에 약한 감독,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투수 운영 방식과 단기전 승부사 기질을 가진 명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SK 시절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이면의 모든 부정적인 면들이 가려진 채, '야신'이라고 불리며 야구계 안팎에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업과 대학을 비롯해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초청받아 리더십과 성공론, 인생론에 대한 강연을 했습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매너 플레이, 꼼수, 편법, 심리적 도발을 동원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야구, 팀을 철저하게 쥐어짜서 거덜내는 운영 스타일,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단조"투수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자기합리화 야구철학으로 인한 선수들의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좋지 않은 언행으로 끊임없이 상대팀을 도발하고 흔들기, 프런트의 권한을 전부 가져가 자기 양껏 운용하면서도 항상 프런트와 마찰을 빚는 독선적이고 모난 성격, 심한 뒤끝으로 팀을 떠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팀을 극렬히 비난하는 행태 등으로 야구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항상 구단 프런트에 전권과 대대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번번이 프런트와의 갈등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 구단에 못 머물고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감독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 중에도 계속된 언플로 그는 항상 프런트라는 기득권에게 쫒겨나는 강직한 야구인으로 포장되었습니다.
김성근이 경질되고 난 후 팀은 혹사로 망가진 선수들과 은퇴할 시기가 지난 노장들만 남은 황폐한 상황이 됩니다.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키울만한 자원도 없습니다.
게다가 밖에서는 김성근이 끊임없이 팀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팀을 더 흔들어 놓는 상황입니다.
김성근의 후임 감독들은 이렇게 어려운 암흑기 상황의 팀을 맡아 이끌게 되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김성근의 추종자들은 "거봐라 역시 김성근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플을 했습니다.
물론 김성근이 2017년 한화에서 물러난 직후 2018년 후임 감독으로 한용덕이 오자마자 10년 동안 꼴찌와 하위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한화가 11년만에 단숨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했고, 이후 추종자들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SK 시절 3회 우승 실적을 내세워 각종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어두운 점들을 모두 미화하고 철저히 야신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여 김성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쳐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직을 맡으면서 현장에 복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한화 감독에 부임하면서 그 동안 가려져 있던 김성근 야구의 문제점들인 비열하다 못해 추악한 야구, 살려조로 대표되는 혹사, 마구잡이식 기용, 쥐어짜기 운용, 구시대적 훈련 방법 등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추잡하고 역겨운 민낯짝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지금까지도 야빠들의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간 묻혀있던 김성근의 각종 어두웠던 과거 행적들이 속속 다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저평가되어있던 후임 지도자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는 아래 두 인용문으로 잘 설명됩니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사실 이것은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을 이긴 뒤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김응용은 패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밝혔지만,김응용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 말은 김성근 팬들에게 윤색되어 김성근을 추앙하기 위해 오랫 동안 인용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후속 인터뷰로 "그 신도 여러 가지의 신이 있잖아요.
"라는 후세에 재평가되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본인을 더 띄우기 위한 의도의 인터뷰였습니다.
김성근 팬들이 주장하는 야신이라는 단어는 김응용 감독에게 더 어울리는데 말입니다.
사실 그 김응용도 한화에서의 행보는 심각하기 그지 없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김성근 야구'는 몰인간적이고 폭압적입니다.
그리고 비민주적입니다.
자율화와 인간 중심이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 그는 한국 야구를 황폐화시켰고, 리그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독단적이고 획일적이고 강압적입니다.
한국 야구에 더 이상의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김성근 야구'의 실패가 주는 교훈이 두 기사에서 설명하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2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과 2016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바뀐 셈.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부터 불펜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구사했고 이는 2000년대 후반 SK 감독시절 이른바 '벌떼야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감독 커리어 전반기에는 태평양, 쌍방울을 맡아 특유의 쥐어짜기식 혹사 운영으로 하위권이었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여 하위권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데 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OB, 삼성 등 강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쌍방울 시절은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하위권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 팬들에 의해 '김성근의 쌍방울 신화'로 포장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쌍방울이 무척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쌍방울은 오히려 선수 연봉 총액 1위 구단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선수들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그가 퇴임한 후 예외없이 암흑기에 빠져들었습니다.
2002년 LG가 정규순위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3위, 2위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포스트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을 거치는 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탈락했기 때문에 단기전에 약한 감독,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투수 운영 방식과 단기전 승부사 기질을 가진 명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습니다.
SK 시절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이면의 모든 부정적인 면들이 가려진 채, '야신'이라고 불리며 야구계 안팎에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업과 대학을 비롯해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초청받아 리더십과 성공론, 인생론에 대한 강연을 했습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매너 플레이, 꼼수, 편법, 심리적 도발을 동원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야구, 팀을 철저하게 쥐어짜서 거덜내는 운영 스타일,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단조"투수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자기합리화 야구철학으로 인한 선수들의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좋지 않은 언행으로 끊임없이 상대팀을 도발하고 흔들기, 프런트의 권한을 전부 가져가 자기 양껏 운용하면서도 항상 프런트와 마찰을 빚는 독선적이고 모난 성격, 심한 뒤끝으로 팀을 떠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팀을 극렬히 비난하는 행태 등으로 야구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항상 구단 프런트에 전권과 대대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번번이 프런트와의 갈등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 구단에 못 머물고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감독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 중에도 계속된 언플로 그는 항상 프런트라는 기득권에게 쫒겨나는 강직한 야구인으로 포장되었습니다.
김성근이 경질되고 난 후 팀은 혹사로 망가진 선수들과 은퇴할 시기가 지난 노장들만 남은 황폐한 상황이 됩니다.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키울만한 자원도 없습니다.
게다가 밖에서는 김성근이 끊임없이 팀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팀을 더 흔들어 놓는 상황입니다.
김성근의 후임 감독들은 이렇게 어려운 암흑기 상황의 팀을 맡아 이끌게 되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김성근의 추종자들은 "거봐라 역시 김성근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플을 했습니다.
물론 김성근이 2017년 한화에서 물러난 직후 2018년 후임 감독으로 한용덕이 오자마자 10년 동안 꼴찌와 하위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한화가 11년만에 단숨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했고, 이후 추종자들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SK 시절 3회 우승 실적을 내세워 각종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어두운 점들을 모두 미화하고 철저히 야신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여 김성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쳐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직을 맡으면서 현장에 복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한화 감독에 부임하면서 그 동안 가려져 있던 김성근 야구의 문제점들인 비열하다 못해 추악한 야구, 살려조로 대표되는 혹사, 마구잡이식 기용, 쥐어짜기 운용, 구시대적 훈련 방법 등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추잡하고 역겨운 민낯짝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지금까지도 야빠들의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간 묻혀있던 김성근의 각종 어두웠던 과거 행적들이 속속 다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동안 저평가되어있던 후임 지도자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는 아래 두 인용문으로 잘 설명됩니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사실 이것은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을 이긴 뒤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김응용은 패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밝혔지만,김응용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 말은 김성근 팬들에게 윤색되어 김성근을 추앙하기 위해 오랫 동안 인용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후속 인터뷰로 "그 신도 여러 가지의 신이 있잖아요.
"라는 후세에 재평가되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본인을 더 띄우기 위한 의도의 인터뷰였습니다.
김성근 팬들이 주장하는 야신이라는 단어는 김응용 감독에게 더 어울리는데 말입니다.
사실 그 김응용도 한화에서의 행보는 심각하기 그지 없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김성근 야구'는 몰인간적이고 폭압적입니다.
그리고 비민주적입니다.
자율화와 인간 중심이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부정했습니다.
… 그는 한국 야구를 황폐화시켰고, 리그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독단적이고 획일적이고 강압적입니다.
한국 야구에 더 이상의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김성근 야구'의 실패가 주는 교훈이 두 기사에서 설명하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2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과 2016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바뀐 셈.
3.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
가쓰라고교 시절.
우측이 김성근.
흔히 김성근을 소개하는 언론 기사마다 거의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일본에서의 김성근의 학창 시절은 조선인으로서 차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스스로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김성근 스스로 이런 언론 내용에 대해 "글쎄"라고 말하며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혔습니다.
대표적인 노리타이자 김성근 측근 언론인인 정철우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때 싸움을 잘해서 이후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고, 싸움을 잘해서 중고교 시절 학교의 주류 즉 쌈짱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김성근이 학폭 가해자의 위치에 있으면 있었지, 결코 조선인이라고 차별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신이 학생들을 주도해서 단체로 수업을 째고 도망가서 여선생이 울었다는 일화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학교에서 이른바 인싸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걸 아는 학생도 별로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고3 때 재일동포야구단에 포함되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지만 전혀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김성근은 중학교 땐 우익수 포지션이었습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우익수가 중요하지만 그때는 제일 못하는 사람이 우익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모자라니까 자기를 갖다놨지 않나 싶다고 말했습니다.
김성근 자기자신이 생각해도 야구를 못했다고 합니다.
또 발이 아주 느린 선수였다고 합니다.
중견수 앞 땅볼 아웃(.
)을 당한 적이 있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을 정도.
김성근은 교토 헤이안고를 비롯한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습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야구 명문고들은 사립이었는데, 자신은 돈이 없어서 공립인 가쓰라고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성근 자서전의 이같은 내용에 대해서 많은 야구팬들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장훈도 형이 가장 노릇을 할 정도로 심하게 가난했지만 사립 학교인 나니와 상고로 진학했습니다.
똑같이 가난했던 장훈도 사립학교로 갔는데 이게 과연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을까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구심이었습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야구팬들과 노리타들 사이에 넷상에서 설전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허무하게도 나중에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그동안 노리타들의 피의 쉴드가 무색하게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해서)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라고 덤덤히 말했습니다.
이전에 나온 자서전에서의 MSG를 빼고 사실을 담백하게 털어놓은 것.
물론 2011년 시점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야신이 되었기에 이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신감도 생겼을 터.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야구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김성근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살펴보면 가쓰라고의 야구부는 운동부로서의 야구부가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 있는 방과후 특활반 개념의 야구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성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가쓰라고에서는 야구부라도 주5일 동안의 정규 수업에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해야만 했고 주말에만 경기했다고 합니다.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 김성근 "野神을 만든 건 두번의 '神내림'… 눈이 확 뜨였죠"김성근의 자서전을 보면 상황은 더욱 열악합니다.
장비는 커녕, 훈련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었습니다.
훈련이라고는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했으며 옛날 야신으로 칭송받던 시절의 인터뷰에서도 본인의 집이 찣어지게 가난해서 야구를 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동작을 따라했다며 인터뷰도 했었습니다.
우익수였던 김성근은 고등학교 시절, 3학년들이 졸업하고 던질 투수가 한 명 밖에 안남자 한번 나가서 던져보라고 시켜서 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투수가 아니었다고.
자서전을 보면 고교시절 자나깨나 야구만을 생각한 것처럼 묘사되나,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고교 시절 김성근은 야구 외에도 축구, 마라톤, 수영 등 다양한 종목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대회에도 나갔다고 합니다.
특히 축구부에서 수비수로 뛰었고, 그때 등번호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야신'의 축구 실력은?.
아무튼 이런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여 야구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김성근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접어야할 운명인 듯 했습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겼으니.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언론 기사에 따르면 김성근이 고시엔에서의 활약으로 재일동포야구단에 뽑혔다고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야구 비명문고 학생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야구 명문고 학생들은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선발에서 제외했습니다.
또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이 고3이었던 1959년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고 김성근 가족은 곧 북한으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북한의 선전에 혹해서 김성근 가족도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던 것.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김성근은 재일동포야구단으로 한국에 갔다왔던 것.
한국에 갔다온 김성근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야구로 충분히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간절히 설득했습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북한에는 야구가 없다는 점이 그가 절박하게 가족들을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결국 그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북한이 지금 어떤 나라인지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가족을 살린 선택이 된 셈.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김성근은 동아대에서 일학년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하고 입학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동아대 재학 당시 언어불통 등으로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아대에서 지낸 반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언어가 잘 통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19세의 청춘 김성근은 나름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김성근 본인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나.
하지만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다고.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때 김성근은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연예계는 실력제일주의 풍토로 재일교포가 거의 차별받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교포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김성근의 해명은 사실상 거짓말입니다.
예를 들어 구단 오너가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김일융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당시 일본인 학생만 드래프트에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시킨 후 그를 입단시킨 것이 논란이 되어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어쨌든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곳은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던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이 상호차량 야구부는 사회인야구 2부리그라고 부를 수 있는 클럽팀인데, 일본 사회인야구는 보통 생각하는 실업야구 개념의 회사등록팀이 있고, 이 밑의 단계인 클럽팀이 있으며, 그 아래 단계로 보통 일반적으로 돈 안받고 하는 동호인 야구인 쿠사야큐팀이 있습니다.
클럽팀은 일반적으로 오전근무만 하거나 아예 안하기도 하는 회사등록팀과는 달리 오전오후 회사 업무를 다 보고 남는 시간,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훈련을 합니다.
야구부 활동으로 월급이 나오며, 정식으로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되어 도시대항전 등 실업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완전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은 한국 사야와 같은 개념의 팀인 쿠사야큐.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노선 개념의 팀으로 클럽팀에서도 프로지명자가 종종 나옵니다.
이런 클럽팀 출신으로 성공한 선수는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가 대표적.
물론 프로가 아닌 만큼 같은 클럽팀이라도 수준 차이가 상당하고 상호차량은 2004년 교토 사회인대회 이후 기록이 없어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이정도 팀은 기본적으로 비선출은 아예 받아주질 않습니다.
마치 김성근이 회사 동아리 활동이나 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이 정도 팀에서 뛰었으면 어느정도 제대로 야구를 배워 야구로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여튼 프로지명을 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니었음은 분명하고, 김성근은 차별이 아니라 야구를 못해서 좋은 팀에 못간 것입니다.
일본 이후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처럼 김성근이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프로급으로 배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고교생활 때 선수를 꾸어 와야 했지만 주말마다 시합을 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만 해도 보통 아마추어 이상의 시합량입니다.
또 캐치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쓰여 있지만, 캐치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캐치볼이야말로 야구에서 가장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훈련입니다.
흔히 여러분들이 하는 동네 캐치볼과 선수들의 캐치볼은 이름만 같은 것인데 이걸 우스운 것처럼 써놓은 건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방증.
선수들의 캐치볼 훈련은 점점 거리를 늘려서 롱토스 수준으로 늘려서 송구, 포구 훈련역할을 하거나(야수), 전신을 써서 투구하듯 하는(투수) 각 잡힌 훈련으로, 점심시간마다 이걸 했다는 건 시간은 짧아도 어쨌든 매일 제대로 투구연습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하고 실전까지 충분히 치렀으며,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된 팀에 몇달이나마 소속되었는데, 그 정도만으로도 당시 한국에선 국가대표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리 당시 한국야구 수준이 일본야구와 차이가 컸다 해도 나름 돈 받고 야구하는 선수들이 있는 나라였는데 동네야구만 한 사람이 국가대표는 못 됩니다.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야구팀 교통부에 입단하면서 한국 실업야구리그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습니다.
실업야구가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한 1964년, 김성근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를 기록했습니다.
다만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렸습니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됩니다.
다만 1963년 재일교포 신용균과 김영덕이 전성기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진출하여 리그 적응기를 거친 후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김성근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또 국내 선수들도 변화구를 배우며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팀도 많지 않았고 경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그 전체에 투수를 통틀어도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와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송구에 약점을 보여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됩니다.
다만 김성근 본인은 경기 전날까지 폭음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선수생활을 그만두었다고 밝혔습니다.
뭐 그때 당시 폭음은 기본이요 몸관리 제대로 못하는 선수들이 절대 다수였던 시대인지라.
1961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데 기여했습니다.
이것의 그의 유일한 국가대표 경력입니다.
1963년 일본대표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던 제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김성근은 청소년 대표로 뛴 적이 없고, 성인 국가대표로 1961년 단 한번 발탁된 것이 전부다.
물론 지금보다도 국제대회가 더 적던 시절 한 번만이라도 발탁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커리어.
지금도 A급 국가대표로 단 한번이라도 발탁될 선수면 리그 최상급 선수입니다.
자기포장의 달인인 김성근은 일본 사회인야구도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는데, 일례로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 최일언이 OB에 영입되었을 때 김성근은 "최일언은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정통파로 피칭을 배운 선수"라고 치켜 세웠다.
물론 80년대 당시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KBO리그보다 두세 급 이상 수준이 높은 리그였습니다.
노모 히데오가 뛰던 리그가 80년대 일본 사회인야구였으며, 당장 그 최일언만 해도 일본 프로팀을 노릴 수 있는 선수였고, OB에서 첫해부터 167이닝을 던지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학졸업 후 프로로 권토중래를 노리는 인원들이 입단하는 리그로, 프로 상비군쯤 되는 리그다.
사회인야구 출신 드래프티들은 입단즉시 NPB 1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사회인야구 이야기는 김성근의 말이 백번 맞고 자기포장도 뭣도 아니고 팩트만 말한겁니다.
현역시절 좌완 정통파 투수였습니다.
김성근 감독팬들에 따르면 완벽한 투구폼을 지닌 투수였다고 하는데,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나름 싱커는 개발된 지 10년 정도 된 최신 변화구였기에 김성근을 비롯한 재일교포 선수들이 가져온 선진문물인데, 당시 지금같은 방송중계나 기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어느 경기에서 뭘 던졌네 하는 서로간의 구두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김성근 본인이 경기도중 싱커를 구사했는데 다른 투수가 그걸 먼저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이 최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고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다.
여튼 정말 최초인지는 몰라도 최초로 싱커를 던진 몇 명의 투수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는 맞다.
김성근은 1964년 12월 일본으로부터 더이상 관광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합니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이나 인터뷰, 강연에서 여러차례 이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 달 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져 가족들을 만나는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습니다.
참고로 한일국교정상화는 1961년부터 양국간 협조가 시작되어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양국간의 회담이 이어졌습니다.
1964년 3월부터는 각 대학교에서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발생했습니다.
학생 반대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운동은 한일국교정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굴욕 협상을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일본의 침략 행위를 보상받기 위해서는 날림으로 협상하지 말고 충분히 많은 액수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그해 11월 새로 총리에 취임한 사토 에이사쿠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국정 제1의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리하여 1964년말부터 한일국교정상화는 급진전되어 1965년 2월에 기본조약이 체결되었고, 세부 내용이 조율된 후 동년 6월에 정식 조인되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지 두달여만에 한일국교정상화 기본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1964년 12월말 영구귀국한 김성근이 가족과 영원히 생이별을 결심하고 눈물을 쏟았다는건 김성근 특유의 언플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김성근 본인도 머쓱했는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억지 트집에 가까운데,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국교 정상화 기본합의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본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성근 본인의 말대로,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대 시대상을 보면 김성근의 가족도 처음에는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는 총련계가 대다수였고 지금보다 훨씬 남북간 이념대립이 격렬했던 그 시절,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이라 자유화는 되었어도 조국을 찾아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나 고문을 당한 재일교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국가에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렇다보니 입출국 관리를 까다롭게 했던지라, 말이 좋아 국교정상화지 말 그대로 국가간에 국교만 정상화 하겠다 정도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지도 않았으니, 해외여행허가 자체로도 까다로운데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본, 한국간 허가가 나올지, 또 몇 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한일간 비행기,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서 정말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기 때문에 설령 어느정도 뉴스로 사회분위기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단순히 언플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측이 김성근.
흔히 김성근을 소개하는 언론 기사마다 거의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일본에서의 김성근의 학창 시절은 조선인으로서 차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스스로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김성근 스스로 이런 언론 내용에 대해 "글쎄"라고 말하며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혔습니다.
대표적인 노리타이자 김성근 측근 언론인인 정철우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때 싸움을 잘해서 이후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고, 싸움을 잘해서 중고교 시절 학교의 주류 즉 쌈짱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김성근이 학폭 가해자의 위치에 있으면 있었지, 결코 조선인이라고 차별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신이 학생들을 주도해서 단체로 수업을 째고 도망가서 여선생이 울었다는 일화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학교에서 이른바 인싸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걸 아는 학생도 별로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고3 때 재일동포야구단에 포함되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지만 전혀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합니다.
김성근은 중학교 땐 우익수 포지션이었습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우익수가 중요하지만 그때는 제일 못하는 사람이 우익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모자라니까 자기를 갖다놨지 않나 싶다고 말했습니다.
김성근 자기자신이 생각해도 야구를 못했다고 합니다.
또 발이 아주 느린 선수였다고 합니다.
중견수 앞 땅볼 아웃(.
)을 당한 적이 있다고 본인 입으로 말했을 정도.
김성근은 교토 헤이안고를 비롯한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습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야구 명문고들은 사립이었는데, 자신은 돈이 없어서 공립인 가쓰라고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성근 자서전의 이같은 내용에 대해서 많은 야구팬들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장훈도 형이 가장 노릇을 할 정도로 심하게 가난했지만 사립 학교인 나니와 상고로 진학했습니다.
똑같이 가난했던 장훈도 사립학교로 갔는데 이게 과연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을까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구심이었습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야구팬들과 노리타들 사이에 넷상에서 설전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허무하게도 나중에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그동안 노리타들의 피의 쉴드가 무색하게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해서)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라고 덤덤히 말했습니다.
이전에 나온 자서전에서의 MSG를 빼고 사실을 담백하게 털어놓은 것.
물론 2011년 시점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야신이 되었기에 이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신감도 생겼을 터.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야구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김성근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살펴보면 가쓰라고의 야구부는 운동부로서의 야구부가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 있는 방과후 특활반 개념의 야구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성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가쓰라고에서는 야구부라도 주5일 동안의 정규 수업에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해야만 했고 주말에만 경기했다고 합니다.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 김성근 "野神을 만든 건 두번의 '神내림'… 눈이 확 뜨였죠"김성근의 자서전을 보면 상황은 더욱 열악합니다.
장비는 커녕, 훈련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었습니다.
훈련이라고는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했으며 옛날 야신으로 칭송받던 시절의 인터뷰에서도 본인의 집이 찣어지게 가난해서 야구를 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동작을 따라했다며 인터뷰도 했었습니다.
우익수였던 김성근은 고등학교 시절, 3학년들이 졸업하고 던질 투수가 한 명 밖에 안남자 한번 나가서 던져보라고 시켜서 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투수가 아니었다고.
자서전을 보면 고교시절 자나깨나 야구만을 생각한 것처럼 묘사되나,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고교 시절 김성근은 야구 외에도 축구, 마라톤, 수영 등 다양한 종목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대회에도 나갔다고 합니다.
특히 축구부에서 수비수로 뛰었고, 그때 등번호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야신'의 축구 실력은?.
아무튼 이런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여 야구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김성근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접어야할 운명인 듯 했습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겼으니.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언론 기사에 따르면 김성근이 고시엔에서의 활약으로 재일동포야구단에 뽑혔다고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야구 비명문고 학생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야구 명문고 학생들은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선발에서 제외했습니다.
또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렇게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이 고3이었던 1959년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고 김성근 가족은 곧 북한으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북한의 선전에 혹해서 김성근 가족도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던 것.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김성근은 재일동포야구단으로 한국에 갔다왔던 것.
한국에 갔다온 김성근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야구로 충분히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간절히 설득했습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 무엇보다도 북한에는 야구가 없다는 점이 그가 절박하게 가족들을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결국 그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북한이 지금 어떤 나라인지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가족을 살린 선택이 된 셈.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김성근은 동아대에서 일학년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하고 입학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동아대 재학 당시 언어불통 등으로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동아대에서 지낸 반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언어가 잘 통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19세의 청춘 김성근은 나름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김성근 본인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나.
하지만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다고.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때 김성근은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연예계는 실력제일주의 풍토로 재일교포가 거의 차별받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교포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김성근의 해명은 사실상 거짓말입니다.
예를 들어 구단 오너가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김일융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당시 일본인 학생만 드래프트에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시킨 후 그를 입단시킨 것이 논란이 되어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어쨌든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곳은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던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이 상호차량 야구부는 사회인야구 2부리그라고 부를 수 있는 클럽팀인데, 일본 사회인야구는 보통 생각하는 실업야구 개념의 회사등록팀이 있고, 이 밑의 단계인 클럽팀이 있으며, 그 아래 단계로 보통 일반적으로 돈 안받고 하는 동호인 야구인 쿠사야큐팀이 있습니다.
클럽팀은 일반적으로 오전근무만 하거나 아예 안하기도 하는 회사등록팀과는 달리 오전오후 회사 업무를 다 보고 남는 시간,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훈련을 합니다.
야구부 활동으로 월급이 나오며, 정식으로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되어 도시대항전 등 실업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완전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은 한국 사야와 같은 개념의 팀인 쿠사야큐.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노선 개념의 팀으로 클럽팀에서도 프로지명자가 종종 나옵니다.
이런 클럽팀 출신으로 성공한 선수는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가 대표적.
물론 프로가 아닌 만큼 같은 클럽팀이라도 수준 차이가 상당하고 상호차량은 2004년 교토 사회인대회 이후 기록이 없어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이정도 팀은 기본적으로 비선출은 아예 받아주질 않습니다.
마치 김성근이 회사 동아리 활동이나 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이 정도 팀에서 뛰었으면 어느정도 제대로 야구를 배워 야구로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여튼 프로지명을 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니었음은 분명하고, 김성근은 차별이 아니라 야구를 못해서 좋은 팀에 못간 것입니다.
일본 이후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처럼 김성근이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프로급으로 배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고교생활 때 선수를 꾸어 와야 했지만 주말마다 시합을 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만 해도 보통 아마추어 이상의 시합량입니다.
또 캐치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쓰여 있지만, 캐치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캐치볼이야말로 야구에서 가장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훈련입니다.
흔히 여러분들이 하는 동네 캐치볼과 선수들의 캐치볼은 이름만 같은 것인데 이걸 우스운 것처럼 써놓은 건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방증.
선수들의 캐치볼 훈련은 점점 거리를 늘려서 롱토스 수준으로 늘려서 송구, 포구 훈련역할을 하거나(야수), 전신을 써서 투구하듯 하는(투수) 각 잡힌 훈련으로, 점심시간마다 이걸 했다는 건 시간은 짧아도 어쨌든 매일 제대로 투구연습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하고 실전까지 충분히 치렀으며,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된 팀에 몇달이나마 소속되었는데, 그 정도만으로도 당시 한국에선 국가대표 수준이었습니다.
아무리 당시 한국야구 수준이 일본야구와 차이가 컸다 해도 나름 돈 받고 야구하는 선수들이 있는 나라였는데 동네야구만 한 사람이 국가대표는 못 됩니다.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야구팀 교통부에 입단하면서 한국 실업야구리그 선수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습니다.
실업야구가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한 1964년, 김성근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를 기록했습니다.
다만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렸습니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됩니다.
다만 1963년 재일교포 신용균과 김영덕이 전성기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진출하여 리그 적응기를 거친 후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김성근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또 국내 선수들도 변화구를 배우며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팀도 많지 않았고 경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그 전체에 투수를 통틀어도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와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송구에 약점을 보여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됩니다.
다만 김성근 본인은 경기 전날까지 폭음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선수생활을 그만두었다고 밝혔습니다.
뭐 그때 당시 폭음은 기본이요 몸관리 제대로 못하는 선수들이 절대 다수였던 시대인지라.
1961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데 기여했습니다.
이것의 그의 유일한 국가대표 경력입니다.
1963년 일본대표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던 제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김성근은 청소년 대표로 뛴 적이 없고, 성인 국가대표로 1961년 단 한번 발탁된 것이 전부다.
물론 지금보다도 국제대회가 더 적던 시절 한 번만이라도 발탁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커리어.
지금도 A급 국가대표로 단 한번이라도 발탁될 선수면 리그 최상급 선수입니다.
자기포장의 달인인 김성근은 일본 사회인야구도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는데, 일례로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 최일언이 OB에 영입되었을 때 김성근은 "최일언은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정통파로 피칭을 배운 선수"라고 치켜 세웠다.
물론 80년대 당시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KBO리그보다 두세 급 이상 수준이 높은 리그였습니다.
노모 히데오가 뛰던 리그가 80년대 일본 사회인야구였으며, 당장 그 최일언만 해도 일본 프로팀을 노릴 수 있는 선수였고, OB에서 첫해부터 167이닝을 던지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학졸업 후 프로로 권토중래를 노리는 인원들이 입단하는 리그로, 프로 상비군쯤 되는 리그다.
사회인야구 출신 드래프티들은 입단즉시 NPB 1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사회인야구 이야기는 김성근의 말이 백번 맞고 자기포장도 뭣도 아니고 팩트만 말한겁니다.
현역시절 좌완 정통파 투수였습니다.
김성근 감독팬들에 따르면 완벽한 투구폼을 지닌 투수였다고 하는데,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나름 싱커는 개발된 지 10년 정도 된 최신 변화구였기에 김성근을 비롯한 재일교포 선수들이 가져온 선진문물인데, 당시 지금같은 방송중계나 기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어느 경기에서 뭘 던졌네 하는 서로간의 구두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김성근 본인이 경기도중 싱커를 구사했는데 다른 투수가 그걸 먼저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이 최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고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다.
여튼 정말 최초인지는 몰라도 최초로 싱커를 던진 몇 명의 투수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는 맞다.
김성근은 1964년 12월 일본으로부터 더이상 관광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합니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자서전이나 인터뷰, 강연에서 여러차례 이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 달 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져 가족들을 만나는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습니다.
참고로 한일국교정상화는 1961년부터 양국간 협조가 시작되어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양국간의 회담이 이어졌습니다.
1964년 3월부터는 각 대학교에서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발생했습니다.
학생 반대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운동은 한일국교정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굴욕 협상을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일본의 침략 행위를 보상받기 위해서는 날림으로 협상하지 말고 충분히 많은 액수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그해 11월 새로 총리에 취임한 사토 에이사쿠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국정 제1의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리하여 1964년말부터 한일국교정상화는 급진전되어 1965년 2월에 기본조약이 체결되었고, 세부 내용이 조율된 후 동년 6월에 정식 조인되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지 두달여만에 한일국교정상화 기본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1964년 12월말 영구귀국한 김성근이 가족과 영원히 생이별을 결심하고 눈물을 쏟았다는건 김성근 특유의 언플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김성근 본인도 머쓱했는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억지 트집에 가까운데,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국교 정상화 기본합의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본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성근 본인의 말대로,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대 시대상을 보면 김성근의 가족도 처음에는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는 총련계가 대다수였고 지금보다 훨씬 남북간 이념대립이 격렬했던 그 시절,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이라 자유화는 되었어도 조국을 찾아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나 고문을 당한 재일교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국가에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렇다보니 입출국 관리를 까다롭게 했던지라, 말이 좋아 국교정상화지 말 그대로 국가간에 국교만 정상화 하겠다 정도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지도 않았으니, 해외여행허가 자체로도 까다로운데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본, 한국간 허가가 나올지, 또 몇 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한일간 비행기,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서 정말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기 때문에 설령 어느정도 뉴스로 사회분위기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단순히 언플만은 아닐 것입니다.
4. 은퇴 후
2022 한국시리즈 2차전에 박재홍 해설위원과 함께 인천 SSG 랜더스필드을 찾았습니다.
후문에 따르면 원래 김성근 전 감독이 시구, 박재홍 해설위원이 시타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해 취소되면서 대신 스카이박스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전날 중계를 통해 KS 1차전을 봤다는 김성근 전 감독은 "어제 집에서 봤는데 오늘 높은 곳에서 보니 야구가 새롭다.
더그아웃에서 보는 것이랑 위에서 보는 것이랑 완전히 다르다.
위에서 보니 긴장감 없이 편하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또 "김강민은 많이 늙었더라.
살도 많이 쪘더라"며 웃어보인 뒤 "김강민이 (한국나이로) 41세더라.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선수도 모자란데 우리나라도 그런 선수를 많이 남겨놔야 합니다.
자꾸 바꾸니까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지도자로 기분좋은 순간이 별로 없었지만 가르쳤던 선수가 좋아지고, 성장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 김강민의 홈런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며 "그런 홈런은 쌩쌩할 때도 못 치던 홈런입니다.
어제는 깔끔하게 잘 쳤더라"고 흐뭇한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김광현에 대해서는 "2007년 당시 김광현이 신인이어서 부담감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이겨야겠다는 의욕이 앞서면서 서두르는 것 같더라"며 "너무 오버페이스로 던져서 도중에 지친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11월 7일 이승엽의 뒤를 이어, JTBC의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의 팀인 최강 몬스터즈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최강야구 선임 이후 여러 언론에서 주목을 받게 되자, 다시금 언론에 자주 비추고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암을 3번이나 걸렸으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참았다는 등 이야기를 했고, 본인은 물론 한화 이글스에게도 흑역사였던 한화 감독 시절의 질문을 받자 "모든 분야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오고, 우리나라는 옆동네서 흉내내면 너도 나도 흉내낸다면서, 한화도 거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고 두루뭉술하지만 결국에는 프런트 야구를 선언한 한화를 돌려까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감독의 사명감으로서 말하길, 감독은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송모씨에게 34억을? 확실히 김성근이 여러 선수들의 복리후생(.
)을 이뤼준 것은 사실입니다.
김성근이 맡은 팀들은 전력 쥐어짜기를 하는 그의 성향상 은퇴를 앞둔 선수들도 여럿 영입하는 등으로 로스터를 꽉꽉 채우다보니 선수 총연봉 1위도 여러번 찍었습니다.
2대 감독 부임이후 JTBC에서 타격훈련 후 "정근우 어디 갔어?" 라는 영상으로 다시 인기가 오르고 여러 언론에서도 인터뷰 및 취재로 다시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속기자이자 호위무사 장강훈은 김성근의 이야기를 그대로 선전하는 중인데 김성근의 주장은 "한국야구 질적 저하는 독립리그 등 아마야구와 프로야구 구분화도 문제이나 현 피라미드 체제를 역피라미드화 해야합니다.
"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박용택, 정근우처럼 아직 현역으로 쓸 수 있는 선수들을 세대교체란 명분으로 한국 구단들이 쉽게 버린다며 비판하는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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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에 따르면 원래 김성근 전 감독이 시구, 박재홍 해설위원이 시타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해 취소되면서 대신 스카이박스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
전날 중계를 통해 KS 1차전을 봤다는 김성근 전 감독은 "어제 집에서 봤는데 오늘 높은 곳에서 보니 야구가 새롭다.
더그아웃에서 보는 것이랑 위에서 보는 것이랑 완전히 다르다.
위에서 보니 긴장감 없이 편하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또 "김강민은 많이 늙었더라.
살도 많이 쪘더라"며 웃어보인 뒤 "김강민이 (한국나이로) 41세더라.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선수도 모자란데 우리나라도 그런 선수를 많이 남겨놔야 합니다.
자꾸 바꾸니까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지도자로 기분좋은 순간이 별로 없었지만 가르쳤던 선수가 좋아지고, 성장했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 김강민의 홈런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며 "그런 홈런은 쌩쌩할 때도 못 치던 홈런입니다.
어제는 깔끔하게 잘 쳤더라"고 흐뭇한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김광현에 대해서는 "2007년 당시 김광현이 신인이어서 부담감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이겨야겠다는 의욕이 앞서면서 서두르는 것 같더라"며 "너무 오버페이스로 던져서 도중에 지친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11월 7일 이승엽의 뒤를 이어, JTBC의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의 팀인 최강 몬스터즈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최강야구 선임 이후 여러 언론에서 주목을 받게 되자, 다시금 언론에 자주 비추고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암을 3번이나 걸렸으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참았다는 등 이야기를 했고, 본인은 물론 한화 이글스에게도 흑역사였던 한화 감독 시절의 질문을 받자 "모든 분야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오고, 우리나라는 옆동네서 흉내내면 너도 나도 흉내낸다면서, 한화도 거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고 두루뭉술하지만 결국에는 프런트 야구를 선언한 한화를 돌려까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감독의 사명감으로서 말하길, 감독은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송모씨에게 34억을? 확실히 김성근이 여러 선수들의 복리후생(.
)을 이뤼준 것은 사실입니다.
김성근이 맡은 팀들은 전력 쥐어짜기를 하는 그의 성향상 은퇴를 앞둔 선수들도 여럿 영입하는 등으로 로스터를 꽉꽉 채우다보니 선수 총연봉 1위도 여러번 찍었습니다.
2대 감독 부임이후 JTBC에서 타격훈련 후 "정근우 어디 갔어?" 라는 영상으로 다시 인기가 오르고 여러 언론에서도 인터뷰 및 취재로 다시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속기자이자 호위무사 장강훈은 김성근의 이야기를 그대로 선전하는 중인데 김성근의 주장은 "한국야구 질적 저하는 독립리그 등 아마야구와 프로야구 구분화도 문제이나 현 피라미드 체제를 역피라미드화 해야합니다.
"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박용택, 정근우처럼 아직 현역으로 쓸 수 있는 선수들을 세대교체란 명분으로 한국 구단들이 쉽게 버린다며 비판하는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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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음/말투
김성근의 일본식 발음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합니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입니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거의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습니다.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습니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습니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리다는 것입니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도 원인의 일부분 정도는 차지하지만, 주된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리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1970년대 후반 KBS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한국말을 쓸 때 동남 방언이 약간 섞인 모습도 보입니다.
사실 언어발음 습득은 감각의 문제라,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에 나가 보면 김성근만큼 해당 국가에 오래 살았어도 현지 발음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한국식 발음의 영어/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도 부지기수고, 반면 몇년만 살아도 현지인과 비슷해지는 케이스도 있는 등 개개인이 타고난 감각에 기대는 바가 커서 김성근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고, 어찌보면 차별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장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한국어로 인문학 서적을 몇 권이나 써낼 정도로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 하는 박노자도 발음은 굉장히 어눌합니다.
어휘력/언어구사력과 발음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김영덕이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것은 그냥 김영덕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것입니다.
다문화사회인 미국은 그래서 문법만 통하면 발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편이고, 그런 기준에서 볼 때 김성근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합니다.
일본식 발음을 고집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그렇다는 주장은 외국어를 익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부당한 트집에 가깝다.
애초에 김성근의 발음에 약간 일본식 발음이 들리거나 해서 그렇지 선수단 내외에서 의사소통으로 문제된 적도 없고, 인터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기 할 말을 명확하게 잘 해내기때문에 사실 문제삼기엔 어렵다 볼 수 있습니다.
즉, 아직 이민자에 익숙치 않은 한국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마, ~~~ 아닌가 시프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일종의 캐릭터성으로 잡아 패러디하곤 합니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입니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거의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습니다.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습니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습니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리다는 것입니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도 원인의 일부분 정도는 차지하지만, 주된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입니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리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1970년대 후반 KBS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한국말을 쓸 때 동남 방언이 약간 섞인 모습도 보입니다.
사실 언어발음 습득은 감각의 문제라,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에 나가 보면 김성근만큼 해당 국가에 오래 살았어도 현지 발음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한국식 발음의 영어/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도 부지기수고, 반면 몇년만 살아도 현지인과 비슷해지는 케이스도 있는 등 개개인이 타고난 감각에 기대는 바가 커서 김성근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고, 어찌보면 차별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당장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한국어로 인문학 서적을 몇 권이나 써낼 정도로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 하는 박노자도 발음은 굉장히 어눌합니다.
어휘력/언어구사력과 발음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김영덕이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것은 그냥 김영덕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것입니다.
다문화사회인 미국은 그래서 문법만 통하면 발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편이고, 그런 기준에서 볼 때 김성근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합니다.
일본식 발음을 고집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그렇다는 주장은 외국어를 익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부당한 트집에 가깝다.
애초에 김성근의 발음에 약간 일본식 발음이 들리거나 해서 그렇지 선수단 내외에서 의사소통으로 문제된 적도 없고, 인터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기 할 말을 명확하게 잘 해내기때문에 사실 문제삼기엔 어렵다 볼 수 있습니다.
즉, 아직 이민자에 익숙치 않은 한국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마, ~~~ 아닌가 시프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일종의 캐릭터성으로 잡아 패러디하곤 합니다.
6. 기타
-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 야구 연구를 위해 해부학까지 공부하신 분이라는 언론과 노리타의 포장질에도 불구하고 실제 김성근은 미신을 아주 잘 믿고 따른다고 합니다. 그것을 잘 나타낸 글이 있는데 이는 이종남 야구전문기자가 쓴 기사를 배지헌 블로거가 발굴 해내어 옮겨 놓은 것입니다. 김성근과 변도사 내용을 보면 도사에게 혹해 극기훈련을 가서 얼음물 입수를 했는데 그걸 지시한 김성근 본인은 쏙 빠져서 열외하다가 의사가 얼음물 찜질이 간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당연한 말이지만 아무 상관없습니다.) 해주니 김성근은 그날 이후 얼음물 입수 매니아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 선호하는 등번호 38번은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엽 해태, MBC 감독의 등번호로 김동엽 전 감독이 작고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달게 된 등번호입니다. 김동엽은 지금 김성근의 아내인 오효순을 소개시켜 줬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습니다. 여담으로 프로야구 출범 초기 코치와 감독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쌍방울 감독 시절 91번을 달았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코칭스태프들이 즐겨 다는 70번대 이상 등번호를 달아왔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줄곧 38번을 달고 있습니다.
- 야구에 김성근이 있다면 축구에는 주제 무리뉴가 있을 정도로 둘의 운영 스타일이라든가 말하는 스타일이 닮은 편입니다. 다만 무리뉴가 김성근보다는 좀 더 엘리트 코스였고 더 많은 클럽을 돌았으며 무엇보다 무리뉴는 선수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감독입니다.
- 전권을 요구하거나 엄청난 훈련량, 정신력을 중시하고 별의별 이상한 규칙을 만드는 건 축구의 펠릭스 마가트와 공통점으로 꼽힙니다. 다만 김성근이 베테랑을 선호하는 것과는 반대로 마가트는 유망주를 선호합니다.
- 일본에서 살던 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 항상 만취 상태로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쳐야 했던 넓은 기차 선로에서 그만 열차에 치이는 변을 당했고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성근 감독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고 이걸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 2007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마치고 상대 선발투수였던 리오스에 대해 '정상이 아닙니다. 9회까지 150㎞/h의 공을 던진다는 게 믿을 수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기사를 읽은 두산 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야구 팬들은 노망이 났다는 둥 비난 일색이었고, 기자도 말하기가 껄끄러웠는지 단순한 흔들기 발언으로 치부하고 말았는데, 그 뒤 리오스는 일본으로 진출한 후 금지약물인 스타노조롤을 복용한 것이 밝혀져 김성근의 눈이 정확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극성 안티세력들은 이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스타노조롤은 비정상적인 근육회복을 가능케하여 근실패이후 초인적인 회복속도를 보여주며 덕분에 웨이트 증량, 파워 및 민첩성 향상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약물이며 이 약물이 성적형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빼박캔트. 사실 이미 시즌 중반, SK와의 경기에서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미국에 출국한 이후 당일 오전 바로 귀국해 완봉승을 거뒀기 때문에, 이 모습이 각인된 김성근 감독으로선 결국 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야구 팬들은 장시간의 비행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은 리오스의 책임 정신과,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준 기량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약물 의혹뿐만 아니라 시즌 중 리오스의 투구 폼에서도 보크 의혹을 제기한 적도 있습니다.
- 코나미컵, 아시안시리즈, 한일 프로야구 최강전 등을 출전하며 일본을 꺾고 우승해 아시아 최강팀이 되겠다고 우승 의지를 불태웠지만 3번 다 좌절됐습니다. 특히 2008년에는 대만의 퉁이 라이온스에게 홈런을 4방 맞고 10:4로 대패했습니다.
-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덕에, 후배 지도자들에게 이런저런 지적질을 하고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인터뷰가 많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행과 더불어 인터뷰 자체를 빼는 것 없이 매우 화끈하게 발언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표제를 좋아하는 기자들에게는 최고의 소스 제공자. 모래알 드립 개미 드립 실패한 투수 등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은어로 '앵물'입니다.
- 충암고 감독을 그만둔 후인 1979년에 동양방송에서 야구해설을 맡기도 했는데, 해설 중에 일본어가 튀어나온다는 이유로 바로 해직.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말했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몸쪽으로 꽉차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는 이빠이(가득 차서) 들어왔어요!라고 말하고 다음 날 잘렸다고 합니다. 결국 그 빈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하일성.
- 2008년 SBS에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의 해설위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에 칼같이 정확한 예상으로 또 화제가 되었습니다. 정확한 해설덕분인지 야구를 좀 좋아하는 사람들은 SBS로 놓고 보기도. 탁월한 야구 식견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 때문에 일반 시청자들은 그의 해설을 듣기 난감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도 간혹 여러 야구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말투인 '마, ~~~하면 되지 시프요...'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 2013년 5월 17일 SBS ESPN에서 아들인 김정준 해설위원과 함께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LG 경기에 대한 부자(父子) 해설을 진행하였습니다. 1년 뒤 6월 7일에도 똑같은 구장에서 동일한 팀의 경기의 객원 해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 2009년 10월 22일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5차전 때 경기 도중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감독 퇴장 1호라는 흑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2009시즌부터 신설된 '스피드업 규정'에 의한 것으로, 선수단 일부 혹은 전부 철수 시 감독은 즉시 퇴장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 한국시리즈 역사상 2번 있었던, 시리즈를 끝내는 9회말 홈런의 희생양입니다. 2002년 LG 감독 당시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 2009년 SK 감독 당시 나지완의 결승 솔로포.
- 잘 나가던 시절에는 그가 직접 지은 책이나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9회말 리더십》, 《김성근이다》, 《9회말 리더십》, 《김성근 그리고 SK 와이번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 2010년 10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습니다. 무려 41년만의 등판. 포수석에서는 김경문 두산 감독이 그의 공을 받아 줬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 타자만 잡고 안타 3개를 맞은 뒤 2점을 주고 자진해서 마운드에서 내려왔습니다.
-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 출연, 그의 야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손님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하일성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중간중간 '이 사람 왜 불렀어?'라고 농조로 툴툴거렸습니다. 한편 이날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한국 신문에 최초로 연속사진을 도입하게끔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으며, 선수시절로 돌아가면 이대호와 가장 붙어보고 싶다고도 밝혔습니다. 그 외 탐나는 선수로는 류현진과 봉중근을 꼽았습니다. 또한 자기가 이대호와 류현진을 맡게 되면 그들의 살을 뺄 것이라고 했습니다.
- 2010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스포츠 부문을 수상하였습니다. 스포츠 지도자로서는 최초라고 합니다.
- 2008년 9월 3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프로야구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5월 10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 프로야구 감독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습니다. 뒤이어 2011년 5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7대 4로 이기면서 또 김응용에 이어 역대 감독 중 두 번째로 1,200승을 달성하였습니다.
- 2011년 8월 들어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2011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는 기습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시 SK 팬들은 한마디로 패닉에 빠졌습니다. 배은망덕은 프런트 종특이라느니, 인천예수를 골고다 언덕으로 내몰았다느니, 신생 NC 다이노스 1기 팬 모집이니 뭐니 하며 허탈감과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후, 전설이 된 그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김성근 열풍이 식은 시점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이건 김성근이 조용히 떠나는 대신 작정하고 언플해서 구단과 이만수 감독을 한꺼번에 엿 먹인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엿을 먹은 SK 프런트는 인터뷰 발표 바로 다음날인 8월 18일자로 김성근을 경질했습니다.
- 야구계 기담으로 김성근의 저주가 있습니다. 본래는 "김성근을 버리는 팀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김성근 없으면 안된다)"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김성근의 재임 시절 저지른 민폐질로 인해 구단과 후임 감독들이 그 여파를 치우느라 고생한다"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 야인이었던 2011년 11월, 동서식품의 핫초코 미떼 CF에 출연했습니다. 광고 내용은 야구시즌이 끝나 을씨년스러운 야구장 관중석에서 김성근 감독이 보온병에 가져온 핫초코를 꼬마와 나누어 마시면서 '야구하고 싶다'는 꼬마의 말에 '나도요'라고 답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어째 서글프게 들린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이 때 꼬마가 "할아버지 야구 잘하세요?" 라고 묻자 김성근은 "쪼끔" 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광고 크리에이터가 SK 와이번스의 팬이어서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마자 가서 매달렸는데 계속 고사하는 것을 3달 동안 삼고초려해서 섭외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 꼬마는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고, 신일고등학교 야구부를 거쳐 202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이 꼬마가 신인드래프트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때의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 SK 감독 시절 올스타전에서 쇼맨쉽으로 몸무게 순으로 라인업을 짜곤 했습니다. 그 결과 통산 도루 9개인 이대호가 1번 타자 출장, 김동주가 2번 타자 출장. 이종욱, 박기혁같은 주력이 되는 타자들은 7,8번으로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이대호는 기대에 부응하여 출루한 후 도루를 시도하다 도루사를 당했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팬들의 기대, 특히 재미만큼은 확실하게 부응했습니다.
- 2012년 11월 22일, MBC 새 프로그램인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에 첫 주인공으로 출연했습니다. 시작부터 예미넴 스타일로 등장. 초대 손님으로 장미란, 김재현, 마해영이 나왔으며 야구 시작할때부터 지금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고양 원더스의 구단주 허민이 김 감독의 생일선물로 S클래스를선물한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원더스를 이끌어준 전문가의 고마움과 함께 차 안에서 편안히 야구에 대해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근데 김성근 감독은 운전면허가 없습니다. 야구 외에 다른 일로는 시간을 좀처럼 쓰질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LG 감독 시절에도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야구장을 오가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습니다.
- 어느 야구 감독들이나 다 그렇지만, 서울특별시 이외 지역 연고팀의 감독을 맡을 경우 자신의 거주지를 연고지로 옮깁니다. 다만, 김성근 본인 혼자만 살 집을 마련합니다.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에도 구단이 마련해 준 전주시 내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에는 송도국제도시에 홀로 사는 자택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프로 커리어였던 한화 이글스 감독 재임 때도 대전광역시 내에 따로 집을 마련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 팀을 전전하며 혼자 살아온 이력이 어마어마하기에 웬만한 살림은 본인이 다 할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부인 오효순 씨가 주기적으로 김성근이 사는 집에 와서 살림을 대신 하고 가며, 시즌이 끝나고 동계훈련 출발 전까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생활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성수동 자택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취임 직후(1990년 12월)에 마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 2011 시즌 종료 후 스토브리그 때 한 LG 트윈스 팬이 김성근 감독의 LG 복귀한다고 터트린 거짓 루머 때문에 야구 팬덤 한정 '포도주스'라는 은어가 생겼습니다. 자세한 것은 포도주스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 연습량이 어마어마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런 감독의 입에서 "너는 그만 연습해도 된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악바리였던 선수가 최동수였습니다. 일례로 최동수는 하룻밤에 스윙을 5,000개씩 했고, 스윙이 끝나고 나면 배트를 쥔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남이 손가락들을 펴 줘야 배트를 놓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성근 감독도 손수 최동수의 손을 펴 주었으며, 이에 최동수는 2001년부터 김성근 감독을 통해 프로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됩니다. 최동수 본인의 말에 의하면 매일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피를 토하던 시절이었다고. 2010년 최동수가 LG에서 SK에 트레이드되었을 때 오히려 최동수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이진영 역시 신인 시절 너무 힘들어서 울면서 공을 받았다는 사례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류택현은 김성근 감독을 통해 커브를 전수받아 2001년부터 중간계투로 뒤늦게나마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 2013년 7월 18일 SBS ESPN 베이스볼 S의 돌직구라는 코너에 출연해서 9개 구단을 평가하였습니다.
-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합니다. 김정준에 대한 평가는 '아버지가 잘생겼다' 였으며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본인의 젊은 시절 외모가 상당했다는 내용이 꽤 자주 언급됩니다. 물론 젊은시절 사진이 꽤 남자다운 매력이 있는데다 당시에는 180cm가 넘는 장신은 드문 편이었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 자서전에선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예쁘다고 언급하는데(과거 결혼사진을 보면 김성근 감독의 아내는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가족들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 http://monthly.chosun.com/upload/0712/0712_434_7.jpg 이것이 김성근 감독의 신혼때 사진이라고 합니다.
- 최훈이 한때 김성근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정우람 혹사 문제로 글과 카툰을 올렸다 논란이 된 적이 있었으나 논란의 발단이 된 카툰 1 2 카툰 2. 이쪽은 논란이 가라앉은 다음에 올라왔습니다. 경질사태 이후에는 삼국전투기와삼국전투기 외전에서 SK 프론트를 비꼬고 김성근 감독이 직언을 하나 쫒겨나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http://blog.cyworld.com/happiest_pharmacy/3578995 하지만 이는 한화 감독 부임전 이야기로 김성근이 쌍팔년도 야구를 시작한 2015년부터는 가장 앞장서서 김성근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2015년의 '이저씨'라는 만화와 2016년 414 대첩 이후 올라온 프로야구카툰은 이례적일 정도로 특정인을 비판하는 카툰입니다.
- 2014년 9월 25일에는 JTBC 뉴스룸 목요 인터뷰,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각각 출연하여 고양 원더스 해체하면서 소감 인터뷰를 했습니다. JTBC 인터뷰, SBS 인터뷰 이후 10월 27일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한 번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JTBC 2차 인터뷰
-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사실상 최초로 팬들의 강력 요구에 의해서 임명된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한화 이글스 프런트는 김응용 감독과 계약이 끝난 후 차기 감독에 김성근 감독을 임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프런트의 의중을 알게 된 팬들은 이에 반발. 아고라에 청원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팬들이 단체로 한화 이글스 홍보팀에 수백통의 전화를 걸고, 심지어 한화 본사에까지 전화를 걸어 그 전화가 회장 비서실까지 닿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본사 1인 시위는 덤. 평소 신문을 보는 김승연 한화 구단주가 이를 모를리 없었고, 결국 구단 프런트에 김 감독 임명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 2004년 이치로를 예로 들며 이승엽 및 메이저리그 진출자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 김성근이 한미일 야구를 비교하는 인터뷰
- 2015년 4월 2일,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 선수들을 그린 파울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마지막에 하송 원더스 단장이 눈물의 해체 선언 때 등장하지만, 정작 구단주인 허민은 한 번도 안 나옵니다. 그리고 고양 원더스가 후에 외국인 선수들만을 엄청나게 기용해 왔다는 게 알려졌는데, 외국인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데럴 마데이의 혹사와 같은 어두운 면을 다루지 않는 등 논란이 많은 영화입니다. 이로 인해 안티 김성근 성향이 강한 자들은 이 영화를 김성근을 치켜세우려고 만든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비꼰다. 설재훈과 안형권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원더스 해체 후 각각 SK와 롯데에 육성선수로 입단했지만 설재훈은 2015시즌 도중, 안형권은 시즌 종료 후 정리되었습니다.
- 2015년 5월 4일에는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 용병술을 주제로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비교한 야구병법 택재의 기술이 SBS 스포츠+에서 방영되었습니다. 유튜브 링크 * 물론 지금 보면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
- 한화그룹 광고에 출연했습니다.
- 2015년 디시인사이드에 갤러리가 생겼습니다.
- 2012년 10월 14일 고양 원더스 감독 재직 중 같은 연고지를 쓰고 있는 농구단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홈 개막전에서 시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 노장 선수들의 복리후생에 앞장서는 감독입니다. 노장 선수들을 영입하는 강박증 덕분입니다. 물론 김성근 본인의 돈이 아닌 구단 돈이 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넥센에서 혹시 포텐이 터질까하고 박병호 덤으로 데리고 왔던 심모씨. 결국 제 실력 남 못주니 보호선수 제외 시켰고 이후 롯데에서 혹시나 하고 데리고 갔으나 역시 그럼에도 자신만만하게 fa신청했다가 미아가 되었지만 우리 감독님께서 선수의 생계를 위해 13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데리고 왔습니다. 비슷한 예로 SK 시절 애제자라고 하는 송모씨를 거금 34억을 주고 데려왔습니다. 이 선수들 fa가47억인데 한물 간 두 선수를 위해 거금을 한화라는 기업을 압박해 내놓게 하다니 노장 선수 사랑은 정말 대단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2년 동안 김태균 조인성을 제외하고 자기가 원하는 선수를 거금을 주고 데려왔습니다. 정우람은 90억, 권혁은 32억, 배영수는 21억, 로저스는 22억 그러나 현재 정우람은 개점휴업상태이고 배영수는 삼성을 나오면서 멋지게 입을 털고 마운드에서도 탈탈 털렸습니다. 권혁은 김감독의 총알받이가 되고 휴식 대신 뺨 툭툭을 통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사실 김성근이 영입하는 베테랑 선수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편인데, 조인성 같이 효과를 톡톡히 본 베테랑이 있는 반면 권용관 같이 오래 기용하면 안 될 선수를 풀타임으로 기용하다 성적도 나락으로 쳐박게 되었습니다.
- 2017년 한화 이글스 감독 해고 직후, 지인이 있는 울산광역시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울산공고 야구부를 매일 오후 찾아와 지도한다는 기사가 뉴스에 떴다.
- 축구감독 김호와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은데 둘 다 과거에는 명장으로 추앙받았으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한 스포츠팀 감독을 맡은뒤 명장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졌던 어두웠던 이면이 드러나면서 추락했습니다.
- 한화 감독 해임 이후 박한 평가를 받다가, 2019년 후반기에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공석이 되면서 커뮤니티들에서는 차기 롯데 감독으로 추천받는 감독 1순위로 되고 있습니다. 물론 노리타들의 개입이 있었겠으나, 프로팀이 맞나 싶을 정도의 실책과 수비를 보여주어 한화와 꼴찌를 다퉜는데, 김성근 전 감독이 수비 중심의 야구로 유명했고 해이해진 팀 기강과 정신력을 잡아줄 최적의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전례로 봤을 때 김성근의 야구관이 롯데 프런트와 상극이라 감독으로 선임되어도 잦은 마찰이 예상됩니다. 이후 키움 히어로즈 수석코치였던 허문회가 차기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롯데 감독 떡밥은 종결.
- 말년에 부동산 대박이 났는데, 김성근 감독이 약 30년 정도 거주한 집이 성수동 재개발계획 부지에 포함되어 있어 결국 자택을 건설사에 135억 원에 매각해 부동산 대박이 났습니다. 이 한 방으로 한평생 야구 감독해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이 와중에 건설사에서 집을 빨리 안 파는 김성근을 압박하기 위해 김성근이 알박기를 한다는 식의 기사를 내서 압박하는 촌극이 있기도 했습니다. 김성근 측은 성수동에 계속 살고 싶은데 마땅한 매물이 없어서 이사를 못 가고 있으며 일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느라 건설사 사람과 만날 시간이 없어 협상이 늦어진 것이라고 해명. 상식적으로 30년동안 알박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여론은 김성근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 여튼 이런 압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결국 상술한 대로 135억원에 집을 팔긴 팔았습니다. 이후 2020년 배우 이시영이 내놓은 건물을 80억원을 주고 2동을 구매하여 1동은 아내 명의로 두었고 1동은 본인 명의로 두었습니다. 부인 오효순 씨가 주도해서 구입했다고 하는데 2010년대 후반 수익형 부동산의 트렌드인 꼬마빌딩을 구입한 걸 보니 부인은 꽤 재테크 잘 아는 복부인인 듯. 김성근은 과거 강연을 다니던 시절 강연으로 60억을 벌어 소득세로만 3억을 냈을 정도로 SK 감독 이후에 많은 재산을 벌었습니다.
- 야구감독으로서는 드물게 전용 응원가가 있었습니다. 원곡은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원래 좋아하던 음악이었다는 듯.이 응원가는 여러 인터넷 방송에서 도네이션 밈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도네받은 영상이 잘 나가다가 갑자기 위 응원가가 나오는 게(통칭 변화구) 주 패턴인데, 원래는 트위치 스트리머 케인의 방송과 골수 한화팬으로 유명하던 매직박 방송 정도에서나 쓰이던 밈이었으나 2020년 후반기 들어 케인과 친분이 있거나 한화를 응원하는 스트리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추세다. 이 응원가가 도네로 재생되는 경우 스트리머를 불문하고 채팅창이 "ㅖㅖㅖㅖㅖㅖ"로 도배됩니다.심지어 같은 한화 소속의 스포츠단인 한화생명e스포츠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2021년 롤드컵 진출 기념으로 데프트 버전도 만들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습니다.
- 이 응원가는 여러 인터넷 방송에서 도네이션 밈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도네받은 영상이 잘 나가다가 갑자기 위 응원가가 나오는 게(통칭 변화구) 주 패턴인데, 원래는 트위치 스트리머 케인의 방송과 골수 한화팬으로 유명하던 매직박 방송 정도에서나 쓰이던 밈이었으나 2020년 후반기 들어 케인과 친분이 있거나 한화를 응원하는 스트리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추세다. 이 응원가가 도네로 재생되는 경우 스트리머를 불문하고 채팅창이 "ㅖㅖㅖㅖㅖㅖ"로 도배됩니다.
- 심지어 같은 한화 소속의 스포츠단인 한화생명e스포츠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2021년 롤드컵 진출 기념으로 데프트 버전도 만들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습니다.
- 2021년 본인과 전성기를 같이 보냈던 SK 와이번스가 신세계그룹에 인수되는 것에 대해 "삶의 일부분이 없어진 느낌"이라고 말하면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SK는 본인을 경질했던 팀이지만 본인에게 영광을 안겨주었고, 덕분에 SK에서 좋은 추억도 많이 남겼을 터인데 그 야구단이 없어진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듯합니다. 더불어 경영상 위기도 없는 모기업이 너무 쉽게 바로 매각을 결정하는 걸 보면서 기업이 야구라는 스포츠로 쌓아온 과정을 너무 경시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와 더불어 야구단은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생을 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의 사례를 보면 아직까지 스포츠팀의 자립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 2022년 11월 은퇴 이후 인터뷰에서 10여년간 암에 세 번이나 걸렸으나 팀과 주변을 위해 알리지 않았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한화 시절 경기중 급작스런 컨디션 악화로 덕아웃을 떠나거나 출근을 못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암이었다면 그런 급작스런 이상이 설명이 되는 부분. 공과를 떠나 노구를 이끌고 건강까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는 점은 경이로운 대목.
7. 총평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공과 과가 갈리며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내리는 인물로, 그 누구보다 명암이 뚜렷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 총 7개팀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각 팀 별로 받은 평가가 천차만별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태평양, 쌍방울, LG, SK, 고양 시절에는 신구조화가 일어날 정도로 선수풀도 어느정도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한때 김응용이 지어준 '야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삼성 시절에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수풀도 충분한 삼성에서 선수단 불화, 이중오더로 나락을 갔고 리빌딩의 대가로 추앙받아 부임한 한화 시절에는 리빌딩 하랬더니 극한의 윈나우를 펼쳐 선수단을 쑥대밭으로 만들정도로 나쁜 점이 부각되며 팀 팬들에게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세이콘, 살완마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서 김성근의 평가가 얼마나 갈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승부사 기질을 통하여 팀의 전력을 짜내는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과거부터 이런 윈나우식 운영으로 약팀을 맡아 호성적을 낸 경험이 꽤 있었으며, 언론플레이를 통한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매우 높은 현장 평가를 통하여 30년동안 한국프로야구의 각종 팀들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의 전성기인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스타 선수를 발굴하는 안목으로 김광현, 최정, 정근우, 김강민, 박정권 등의 스타 선수를 발굴하였고 이후 왕조를 창건하기까지 했으며,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로 다른 많은 야구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야구팬들은 김성근에 대하여 결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데, 김성근은 그가 활동하던 20세기식 야구관을 타협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점 때문에 위에서 언급된 팀의 전력 짜내기의 연장선으로 현대야구에서 용납되지 않는 투수 혹사가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화 이글스의 살려조를 포함하여 박정현, 이동현, 전병두 등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계속된 언론플레이로 인하여 팬들에게 인식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올드스쿨 스타일 감독의 대표주자답게 스타 선수들을 발굴하는 안목은 높았지만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서 유망주를 육성하지는 못했으며, 투수 혹사 성향과 겹쳐져 김성근의 부임 이후 팀들의 성적이 나빠지는 현상인 김성근의 저주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특유의 승리지상주의 매니징 스타일로 인하여 타 팀 팬들에게 여러 비매너 논란과 구설을 만든 것도 그의 평가 하락에 한몫했으며 결국 구시대적 야구관을 통하여 성적을 내지 못한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이후 과거의 명성을 잃고 평가가 폭락하였습니다.
이후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의 연장선으로 프런트와의 갈등을 빚으며 결국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불명예스럽게 사퇴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이미지가 매우 나빠졌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계속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던 김성근은 결국 본인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일본프로야구에서 1군 코치까지 부임하였으며, 80세가 다 되어가는 말년까지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면모를 통하여 현재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당수의 현대야구팬들에게조차도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그와 함께한 거의 대부분의 야구인들, 특히나 그를 거치며 선수 생활에 악영향을 받은 선수들도 그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성근의 매니징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승리지상주의 야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성적에 집착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방식이 꽤 잘 통용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했을 때는 인기에 힘입어 실업리그가 출범은 했지만 명색이 돈 받고 야구한다는 선수들이 변화구는 구경도 못 해본 선수가 태반에, 체계적인 몸관리 등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 김성근이 일본에서 배워온 방식은 무식하게 많은 훈련량으로 밀어붙이는, 지금 와서 보면 주먹구구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못 되던 프로 이전 실업야구 수준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덕분에 실업 시절 명선수로서 다승왕,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으며 감독으로서도 초창기 프로야구판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감독이지만,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그랬다.
장명부가 427이닝 30승을 거둔 게 프로야구 2년차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에 올라온 게 3년차였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게 저 당시 에이스인 이나오 카즈히사, 게일로드 페리같은 선수들은 지금와선 상상도 할 수 없는 300이닝을 척척 먹어줬습니다.
그땐 스포츠 의학, 관리같은 개념이 없고 애초에 프로스포츠로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번다는 개념이 희박해서 젊었을 때 잠깐 하고 모기업에 취직하거나, 모아둔 연봉으로 가게를 열거나 하는 그런 시절이었기에 관리를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김성근처럼 선수를 굴렸다간 30대 찍기도 전에 은퇴하게 되지만 그 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샌디 코팩스를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만든 월터 올스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3일 텀으로 6번씩 완투를 시킨 토미 라소다같은 감독이 명감독으로 칭송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누구나 애초에 선수를 제대로 휴식을 주어가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몰랐으며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습니다.
야구가 아니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하루도 휴일이 없이 달에 2일 혹은 아예 못 쉬거나 일일 근로시간이 14~15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게 불법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인 석면을 뭔지도 모르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면서 마구 흡입해댔고, 야구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행적은 반드시 그 사람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평가되어야 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그 당시의 김성근을 평가하는 것은 베이브 루스나 타이 콥 같은 100년 전의 위대한 선수들을 변화구도 커브 한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활동한 주제에 전설 대접 받는 범부, 세종대왕을 민주정도 모르는 구시대적 왕조체제 하의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시대에 최고가 된 그들을 세상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김성근의 방식은 몸관리는 커녕 프로의식이 덜 정착되어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술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는 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는데, 이는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손민한이 임페리얼 위스키에 떡이 돼서 토하고 나가 완봉했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이 아니고,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숙소에서 술마시다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를 터뜨린 게 2021년이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는 커녕 흡연자 수도 적지 않습니다.
지옥훈련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과 몸관리를 철저히 해 줘야 제 기량을 낼 수 있는데, 솔직히 지금도 한국야구계는 훈련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훈련을 안 해서 문제에 가까운 쪽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진보하면서 90년대의 라루사이즘, 00년대에 화두가 된 스포츠 과학 등 과학이 진보하며 스포츠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스포츠 외적으로도 인권의식이 상승하였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혹사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회복, 관리가 선수의 능력을 더 끌어내준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각종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으나 김성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권혁이나 각종 살려조의 투구는 김성근이 젊은 시절을 보낸 70~80년대 기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에는 야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대에 뒤쳐진 터무니 없는 행위여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성근이 사이코패스거나 뿌리까지 악인이여서 그런 기용을 한 게 아닙니다.
김성근 본인도 그런 혹사와 관리 소홀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을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했고 그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구시대 야구인이었을 뿐입니다.
아직 아마추어리즘과 적은 경기수, 미국이나 일본보다 발전이 늦고 최신메타의 도입이 늦은 한국야구 환경 등 김성근에게 유리한 조건이 충분히 남아있던 SK 시절까지는 전임감독이 물려준 풍부한 선수팜, 본인의 강훈련, 모기업의 대대적인 지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져 야신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대략 SK 때부터 혹사 이야기 등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김성근에게 유리했던 외적 조건으로 좋은 성적을 찍어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러나 김성근이 현장을 떠나있던 대략 5년간 프로야구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김성근식 불펜 짜먹기 야구는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습니다.
특히 신구단 창단이 매우 컸는데, 그전까지는 1년 133경기라는 적은 경기수로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한화시절 정도입니다.
1년에 한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하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고, 어찌됐건 팀 성적은 좋으니 주류여론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체제로 로스터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 일본보다도 많아진 경기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풀, 돌아온 빅볼메타로 인해 힘들어진 지키는 야구, 장마철에 우천으로 인한 휴식 확보가 예전보다 안 되는 등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이상 필승조 한명 불펜노예로 쓰는 정도로는 시즌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3~4명을 동시에 망가지도록 기용해야 할 정도로 김성근식 야구는 힘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집니다.
선동열 등 비슷한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은 잘리거나 은퇴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메타에 맞는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상황임에도 김성근은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성적도 명분도 둘 다 잃은 채 잘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역 시절에는 명선수로, 감독 시절에는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비결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잘 바꾸려 하지 않아서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어 사라져 가고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라져 간다.
김성근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2021년에도 '타협을 하면 안된다', '한계를 넘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조직이 룰을 바꾸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점에서 김성근은 결코 자신의 철학을 바꿀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초,중,고 야구부에서 최고의 선수들만 모은 엘리트 선수들을 통제하려면 이러한 에고가 필요하기도 했고, 김성근을 겪었던 선수들 중에는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선수들은 많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훈련과 기용이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오랜 선수 생활을 보장해줬는 지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김성근은 무자비한 훈련과 혹사, 그리고 꼼수를 성과로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그 성과가 무너졌을 때 김성근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야구 내적인 평가와 별개로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프로선수는 팬 서비스 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에도 이미 김성근은 팬 서비스를 소홀히 할 경우에 벌금을 내는 내규를 선수단에게 지키게 하는 등 팬 서비스에 대해 선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그리고 야구팬들의 평가 외로 선수들의 평가는 희한할 만큼 높습니다.
어느정도 립서비스는 필요한 언론 인터뷰는 차치하더라도 한때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뛴 박현준이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썰을 풀때도 선수로 거쳐가면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등 팬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야구선수들에게 인망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년인 2022년에는 2018년 이후 계속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간간히 인터뷰하는 걸 제외하면 구설수를 만들어내는 빈도도 줄어들었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앞으로 새로운 감독직을 수락할 가능성도 적어보이며 경질된지 6년 가량에 시간이 흐르면서 한화 시절 응원가가 재발굴되고 김성근의 철학의 밈화 등으로 여론이 많이 완화된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여전히 심하게 호불호가 갈려 농담으로라도 김성근 복귀를 말하는 순간 팬들의 뭇매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김성근 보단 '밈'으로서의 김성근이 대세가 된 셈.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 총 7개팀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각 팀 별로 받은 평가가 천차만별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태평양, 쌍방울, LG, SK, 고양 시절에는 신구조화가 일어날 정도로 선수풀도 어느정도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한때 김응용이 지어준 '야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삼성 시절에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수풀도 충분한 삼성에서 선수단 불화, 이중오더로 나락을 갔고 리빌딩의 대가로 추앙받아 부임한 한화 시절에는 리빌딩 하랬더니 극한의 윈나우를 펼쳐 선수단을 쑥대밭으로 만들정도로 나쁜 점이 부각되며 팀 팬들에게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세이콘, 살완마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서 김성근의 평가가 얼마나 갈리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승부사 기질을 통하여 팀의 전력을 짜내는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과거부터 이런 윈나우식 운영으로 약팀을 맡아 호성적을 낸 경험이 꽤 있었으며, 언론플레이를 통한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매우 높은 현장 평가를 통하여 30년동안 한국프로야구의 각종 팀들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의 전성기인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스타 선수를 발굴하는 안목으로 김광현, 최정, 정근우, 김강민, 박정권 등의 스타 선수를 발굴하였고 이후 왕조를 창건하기까지 했으며,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로 다른 많은 야구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야구팬들은 김성근에 대하여 결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데, 김성근은 그가 활동하던 20세기식 야구관을 타협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점 때문에 위에서 언급된 팀의 전력 짜내기의 연장선으로 현대야구에서 용납되지 않는 투수 혹사가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화 이글스의 살려조를 포함하여 박정현, 이동현, 전병두 등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계속된 언론플레이로 인하여 팬들에게 인식이 매우 나빠졌습니다.
올드스쿨 스타일 감독의 대표주자답게 스타 선수들을 발굴하는 안목은 높았지만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서 유망주를 육성하지는 못했으며, 투수 혹사 성향과 겹쳐져 김성근의 부임 이후 팀들의 성적이 나빠지는 현상인 김성근의 저주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특유의 승리지상주의 매니징 스타일로 인하여 타 팀 팬들에게 여러 비매너 논란과 구설을 만든 것도 그의 평가 하락에 한몫했으며 결국 구시대적 야구관을 통하여 성적을 내지 못한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이후 과거의 명성을 잃고 평가가 폭락하였습니다.
이후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의 연장선으로 프런트와의 갈등을 빚으며 결국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불명예스럽게 사퇴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이미지가 매우 나빠졌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계속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던 김성근은 결국 본인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일본프로야구에서 1군 코치까지 부임하였으며, 80세가 다 되어가는 말년까지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면모를 통하여 현재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당수의 현대야구팬들에게조차도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그와 함께한 거의 대부분의 야구인들, 특히나 그를 거치며 선수 생활에 악영향을 받은 선수들도 그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김성근의 매니징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승리지상주의 야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성적에 집착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방식이 꽤 잘 통용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했을 때는 인기에 힘입어 실업리그가 출범은 했지만 명색이 돈 받고 야구한다는 선수들이 변화구는 구경도 못 해본 선수가 태반에, 체계적인 몸관리 등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 김성근이 일본에서 배워온 방식은 무식하게 많은 훈련량으로 밀어붙이는, 지금 와서 보면 주먹구구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못 되던 프로 이전 실업야구 수준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덕분에 실업 시절 명선수로서 다승왕,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으며 감독으로서도 초창기 프로야구판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감독이지만,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그랬다.
장명부가 427이닝 30승을 거둔 게 프로야구 2년차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에 올라온 게 3년차였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게 저 당시 에이스인 이나오 카즈히사, 게일로드 페리같은 선수들은 지금와선 상상도 할 수 없는 300이닝을 척척 먹어줬습니다.
그땐 스포츠 의학, 관리같은 개념이 없고 애초에 프로스포츠로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번다는 개념이 희박해서 젊었을 때 잠깐 하고 모기업에 취직하거나, 모아둔 연봉으로 가게를 열거나 하는 그런 시절이었기에 관리를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김성근처럼 선수를 굴렸다간 30대 찍기도 전에 은퇴하게 되지만 그 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샌디 코팩스를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만든 월터 올스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3일 텀으로 6번씩 완투를 시킨 토미 라소다같은 감독이 명감독으로 칭송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누구나 애초에 선수를 제대로 휴식을 주어가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몰랐으며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습니다.
야구가 아니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하루도 휴일이 없이 달에 2일 혹은 아예 못 쉬거나 일일 근로시간이 14~15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게 불법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인 석면을 뭔지도 모르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면서 마구 흡입해댔고, 야구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행적은 반드시 그 사람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평가되어야 합니다.
지금 기준으로 그 당시의 김성근을 평가하는 것은 베이브 루스나 타이 콥 같은 100년 전의 위대한 선수들을 변화구도 커브 한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활동한 주제에 전설 대접 받는 범부, 세종대왕을 민주정도 모르는 구시대적 왕조체제 하의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꼴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시대에 최고가 된 그들을 세상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김성근의 방식은 몸관리는 커녕 프로의식이 덜 정착되어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술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는 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는데, 이는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손민한이 임페리얼 위스키에 떡이 돼서 토하고 나가 완봉했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이 아니고,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숙소에서 술마시다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를 터뜨린 게 2021년이었습니다.
지금도 한국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는 커녕 흡연자 수도 적지 않습니다.
지옥훈련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과 몸관리를 철저히 해 줘야 제 기량을 낼 수 있는데, 솔직히 지금도 한국야구계는 훈련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훈련을 안 해서 문제에 가까운 쪽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진보하면서 90년대의 라루사이즘, 00년대에 화두가 된 스포츠 과학 등 과학이 진보하며 스포츠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스포츠 외적으로도 인권의식이 상승하였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혹사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회복, 관리가 선수의 능력을 더 끌어내준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각종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으나 김성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습니다.
권혁이나 각종 살려조의 투구는 김성근이 젊은 시절을 보낸 70~80년대 기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에는 야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대에 뒤쳐진 터무니 없는 행위여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성근이 사이코패스거나 뿌리까지 악인이여서 그런 기용을 한 게 아닙니다.
김성근 본인도 그런 혹사와 관리 소홀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을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했고 그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구시대 야구인이었을 뿐입니다.
아직 아마추어리즘과 적은 경기수, 미국이나 일본보다 발전이 늦고 최신메타의 도입이 늦은 한국야구 환경 등 김성근에게 유리한 조건이 충분히 남아있던 SK 시절까지는 전임감독이 물려준 풍부한 선수팜, 본인의 강훈련, 모기업의 대대적인 지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져 야신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대략 SK 때부터 혹사 이야기 등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김성근에게 유리했던 외적 조건으로 좋은 성적을 찍어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러나 김성근이 현장을 떠나있던 대략 5년간 프로야구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김성근식 불펜 짜먹기 야구는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습니다.
특히 신구단 창단이 매우 컸는데, 그전까지는 1년 133경기라는 적은 경기수로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한화시절 정도입니다.
1년에 한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하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고, 어찌됐건 팀 성적은 좋으니 주류여론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체제로 로스터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 일본보다도 많아진 경기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풀, 돌아온 빅볼메타로 인해 힘들어진 지키는 야구, 장마철에 우천으로 인한 휴식 확보가 예전보다 안 되는 등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이상 필승조 한명 불펜노예로 쓰는 정도로는 시즌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3~4명을 동시에 망가지도록 기용해야 할 정도로 김성근식 야구는 힘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집니다.
선동열 등 비슷한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은 잘리거나 은퇴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메타에 맞는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상황임에도 김성근은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성적도 명분도 둘 다 잃은 채 잘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역 시절에는 명선수로, 감독 시절에는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비결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잘 바꾸려 하지 않아서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어 사라져 가고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라져 간다.
김성근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2021년에도 '타협을 하면 안된다', '한계를 넘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조직이 룰을 바꾸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점에서 김성근은 결코 자신의 철학을 바꿀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초,중,고 야구부에서 최고의 선수들만 모은 엘리트 선수들을 통제하려면 이러한 에고가 필요하기도 했고, 김성근을 겪었던 선수들 중에는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선수들은 많습니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훈련과 기용이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오랜 선수 생활을 보장해줬는 지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김성근은 무자비한 훈련과 혹사, 그리고 꼼수를 성과로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그 성과가 무너졌을 때 김성근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야구 내적인 평가와 별개로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프로선수는 팬 서비스 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에도 이미 김성근은 팬 서비스를 소홀히 할 경우에 벌금을 내는 내규를 선수단에게 지키게 하는 등 팬 서비스에 대해 선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그리고 야구팬들의 평가 외로 선수들의 평가는 희한할 만큼 높습니다.
어느정도 립서비스는 필요한 언론 인터뷰는 차치하더라도 한때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뛴 박현준이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썰을 풀때도 선수로 거쳐가면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등 팬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야구선수들에게 인망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년인 2022년에는 2018년 이후 계속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간간히 인터뷰하는 걸 제외하면 구설수를 만들어내는 빈도도 줄어들었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앞으로 새로운 감독직을 수락할 가능성도 적어보이며 경질된지 6년 가량에 시간이 흐르면서 한화 시절 응원가가 재발굴되고 김성근의 철학의 밈화 등으로 여론이 많이 완화된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여전히 심하게 호불호가 갈려 농담으로라도 김성근 복귀를 말하는 순간 팬들의 뭇매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김성근 보단 '밈'으로서의 김성근이 대세가 된 셈.
8. 관련 어록
김성근의 예고된 몰락, 적폐가 되어버린 '야신' 신화단순히 성적 부진만 아니라 김성근 부임 이후 끊임없이 거론된 선수 혹사 논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수많은 구설수를 초래했고 한때 든든한 우군이었던 팬들과 구단조차도 질린 나머지 잇달아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 밖에 없었습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입니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습니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습니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합니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나는 개인적으로 한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최근 몇 개월간 얻어 먹은 술의 일정 부분을 한화팬에게 얻어먹었기에 오히려 한화를 저주하면 안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년 시즌 한화가 부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꼴찌가 어디서 놀아" 지옥훈련 부추기는 폭력적 한국인, 2014년 12월 4일, ㅍㅍㅅㅅ.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 밖에 없었습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입니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습니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습니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합니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나는 개인적으로 한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최근 몇 개월간 얻어 먹은 술의 일정 부분을 한화팬에게 얻어먹었기에 오히려 한화를 저주하면 안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년 시즌 한화가 부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꼴찌가 어디서 놀아" 지옥훈련 부추기는 폭력적 한국인, 2014년 12월 4일, ㅍㅍㅅㅅ.
9.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84
|
OB 베어스
|
100
|
58
|
41
|
1
|
1위/6팀
|
3위/6팀
|
1985
|
110
|
51
|
57
|
2
|
4위/6팀
|
4위/6팀
|
|
1986
|
108
|
56
|
48
|
4
|
4위/7팀
|
4위/7팀
|
|
1987
|
108
|
55
|
52
|
1
|
4위/7팀
|
4위/7팀
|
|
1988
|
108
|
54
|
52
|
2
|
5위/7팀
|
5위/7팀
|
|
통산
|
534
|
274
|
250
|
10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89
|
태평양 돌핀스
|
120
|
62
|
54
|
4
|
3위/7팀
|
3위/7팀
|
1990
|
120
|
58
|
59
|
3
|
5위/7팀
|
5위/7팀
|
|
통산
|
240
|
120
|
113
|
7
|
|
||
연도
|
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91
|
삼성 라이온즈
|
126
|
70
|
55
|
1
|
3위/8팀
|
3위/8팀
|
1992
|
126
|
67
|
57
|
2
|
4위/8팀
|
4위/8팀
|
|
통산
|
252
|
137
|
112
|
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96
|
쌍방울 레이더스
|
126
|
70
|
54
|
2
|
2위/8팀
|
3위/8팀
|
1997
|
126
|
71
|
53
|
2
|
3위/8팀
|
3위/8팀
|
|
1998
|
126
|
58
|
66
|
2
|
6위/8팀
|
6위/8팀
|
|
1999
|
81
|
17
|
59
|
5
|
8위/8팀
|
-
|
|
통산
|
459
|
216
|
232
|
11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2001
|
LG 트윈스
|
98
|
49
|
42
|
7
|
6위/8팀
|
6위/8팀
|
2002
|
133
|
66
|
61
|
6
|
4위/8팀
|
준우승/8팀
|
|
통산
|
231
|
115
|
103
|
1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2007
|
SK 와이번스
|
126
|
73
|
48
|
5
|
1위/8팀
|
우승/8팀
|
2008
|
126
|
83
|
43
|
0
|
1위/8팀
|
우승/8팀
|
|
2009
|
133
|
80
|
47
|
6
|
2위/8팀
|
준우승/8팀
|
|
2010
|
133
|
84
|
47
|
2
|
1위/8팀
|
우승/8팀
|
|
2011
|
93
|
52
|
41
|
0
|
3위/8팀
|
-
|
|
통산
|
611
|
372
|
232
|
13
|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시즌
|
최종순위
|
2015
|
한화 이글스
|
144
|
68
|
76
|
0
|
6위/10팀
|
6위/10팀
|
2016
|
132
|
64
|
65
|
3
|
7위/10팀
|
7위/10팀
|
|
2017
|
43
|
18
|
25
|
0
|
9위/10팀
|
-
|
|
통산
|
319
|
150
|
166
|
3
|
|
||
총계
|
2646
|
1384
|
1202
|
60
|
|
김성근,정근우,펑고,이대호,박찬희,인형,감독님 사랑해,근황,혹사,명언,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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